8. 소설과 다른 현실

타향보다 낯선 고향의 이방인

by 은예진

“아씨, 여관을 찾으시는 모양인데 저를 따라오시지요.”


덩치가 크고 얼굴이 온통 수염으로 덮인 사내가 앞을 가로막았다. 본이는 불안한 눈빛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얼굴에 힘을 잔뜩 주었다.


“되었으니 비키시오. 우린 여관 같은 곳에 머물 사람들이 아닙니다.”


“에이, 무슨 말씀을 제가 이 짓 어디 하루 이틀 하는 줄 아십니까. 딱 보니까 아씨는 가실 곳이 없습니다. 저 따라오시지요.”


“이 무슨 무례한 짓이오. 당장 비키지 못하겠소.”


“어허, 눈뜨고 코 베이는 곳이 이곳 경성입니다. 그렇게 어리바리하게 돌아다니다 누구 먹잇감이 될지 모른다니까요. 그러지 말고 저를 따라 오셔.”


사내는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본이는 그가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무시하고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시월이가 본이의 팔목을 덥석 잡았다. 손아귀에 힘을 얼마나 주는지 팔목이 아플 지경이었다.


본이는 시월이에게 아프니 좀 살살 잡으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본이도 잡을 누군가의 팔목만 있다면 젖 먹던 힘까지 내서 잡고 싶었던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장옷 때문이었을까? 이럴 때 유성준을 만난다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경성에서 우연히 라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유성준 밖에 없어서 그를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마음속에 그를 담고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본이가 보던 소설책이었다면 이 순간 유성준이 나타나서 어쩔 줄 몰라하는 두 사람을 구해주었을 것이다.


현실은 소설과 다르다는 것쯤은 본이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수일에게 손찌검을 당하면서 누군가에게 의지하려 했던 제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누구 뒤에 숨지 않고 당당히 맞서겠다는 각오로 기차에 올라탔다.


그러한 의지는 막상 앞을 가로막는 건장한 사내들 앞에서 어이없이 무너지고 제발 유성준이 자전거를 타고 이 앞에 나타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바람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었다.


혹시 아직도 사내가 따라붙는지 뒤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겨우 여관을 잡았다. 역에서 한참을 걸어온 데다 날까지 어두워져서 더는 여관을 찾아 헤매기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골목 안쪽에 자리한 여관은 일성 여관이라는 간판이 없었다면 찾지 못했을 것이다.


가정집처럼 마당이 앞에 있어서 잘못 들어선 것은 아닌가 싶어 다시 나와 보았지만 틀림없는 여관이었다. 여관 주인 여자는 주춤거리며 머물 방이 있는지 묻는 두 사람을 보더니 대답도 없이 앞장섰다. 며칠이나 있을 거냐고 묻지도 않고 문을 열어 보여준 방은 작지만 아늑해 보였다.


“두 사람 얼굴이 말이 아닌 거 알우? 며칠이나 있을지는 몰라도 우선 좀 쉬어야겠수. 방값은 하루 3원씩 선불인데 숨 돌리면 저기 아래채로 가지고 오슈. 오래 있을 거면 일주일 치씩 끊어주시오. 내 하루치는 빼 주리다.”


주인 여자의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어설퍼 보이는 본이와 시월이를 배려해주고 있었다. 방바닥에 손을 대자 차갑게 언 손이 녹아서 간지러울 만큼 따뜻했다. 본이와 시월이는 경성에 도착해서 무사히 머물 곳을 구했다는 생각에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이십 년 동안 고향인 조치원과 이천을 제외하고는 다녀본 적 없는 본이가 경성에서 몸을 누일 곳을 찾았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한 일이었다. 긴장이 풀려서일까 두 사람은 어느 사이 이불도 펴지 않은 상태로 팔을 베고 잠이 들었다. 몸을 구부리고 잠든 그네들의 모습은 마치 뱃속의 아이처럼 연약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경성에서 신식 교육이라고는 전혀 받지 못한 본이가 어떤 일을 겪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결코 순탄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 하나는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얼마나 잤을까 시월이는 베고 잔 팔이 저려서 눈을 떴다. 저린 팔을 흔들며 몸을 일으키자 허기가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온종일 먹은 것이라고는 기차 타기 전에 국밥 한 그릇이 전부였다.


“아씨, 일어나서 밥 먹고 주무세요. 배고프구먼요. 아씨, 아까 아주머니가 밥은 어떻게 하라고 했는지 기억나세요?”


“그러고 보니 밥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안 물어봤구나. 우선 방값을 삼일 치 계산해 주고 물어봐야겠다.”


기지개를 길게 켜고 나서 보퉁이를 뒤지던 본이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처음에는 보퉁이 속에 손을 집어넣고 휘젓더니 곧 펼쳐서 흔들기 시작했다. 속곳과 버선 속까지 흔들었지만 돈을 넣은 주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시월아, 아까 기차 삯 내고 내 돈주머니 혹시 너한테 줬니?”

“아니요, 돈주머니를 왜 제가 갖겠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네 보퉁이 좀 찾아봐라.”

“아씨, 혹시 돈이 없는 거예요?”


본이는 대답하지 못한 채 가지고 있는 옷가지들 솔기까지 펼쳐보며 돈주머니를 찾았다. 혹시나 싶어 입고 있는 속곳 안까지 뒤져보았지만 돈은 보이지 않았다.


“시월아! 우리 어쩐다니?”


“네? 아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알거지가 되다니 이게 무슨 일이래요. 아까 그 사내가 눈뜨고 코 베이는 곳이 경성이라고 하더니 도대체 어떤 놈이 우리 돈을 훔쳐갔대요.”


본이는 기가 막혀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이 추운 날씨에 당장 여관에서 쫓겨나면 어찌한단 말인가. 돌아갈 차비조차 없는 판국이니 눈앞이 캄캄할 뿐이었다. 아득하니 정신을 놓고 있던 본이가 몸을 일으켰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턱을 잡아 올리며 방문 손잡이를 단단히 잡았다. 죽으라는 법은 없으니 부딪쳐보는 수밖에 없었다.


“시월아, 내가 주인아주머니를 만나 사정을 해보겠으니 너는 여기 있어라.”


시월이가 울먹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본이는 신발을 신으면서 이제 정말 자신이 혼자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시어머니 오씨가 준 돈을 쥐고 있을 때만 해도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이 넓은 경성 바닥에 빈털터리로 서 있으니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혼자가 되었음을 실감했다. 동짓달 칼바람은 방에 들어가기 전보다 훨씬 더 세차게 불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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