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서러운 곡소리

타향보다 낯선 고향의 이방인

by 은예진

밤늦도록 세계문학 전집을 읽느라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다. 본이는 방안 깊숙이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깜빡였다. 꿈결인지 생시인지 곡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눈 가장자리가 질척하다. 서글픈 곡소리에 자신도 눈물을 흘린 모양이다.

본이는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이불속에서 그 곡소리의 정체가 무엇일까 생각했다. 아무래도 꿈을 꾼 것 같지는 않았다. 밖에서 시월이가 어서 일어나라며 채근이다. 본이는 혹시나 싶어 문을 열고 머리만 내어 놓은 채 시월이를 불렀다.


“너 혹시 곡소리 듣지 못했느냐?”


시월이는 어깨를 흠칫하더니 고개를 숙인다. 본이와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거나 마주칠 자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곡소리는 무슨 곡소리래요. 어서 일어나 아침이나 드셔요.”


“아무래도 꿈은 아닌 것 같은데. 어찌나 서러운 곡소리가 들렸는지 내가 자면서 따라 울었다니까.”


“아침부터 그런 소리 하지 마시고 어서 일어나세요.”


본이는 따끈하게 불을 땐 방바닥에서 기분 좋은 기지개를 켰다. 땅을 사고, 겨울날 양식을 사고 땔감에 세계문학 전집까지 샀으니 쓴 돈보다 남은 돈을 헤아리는 것이 빠르다. 올케의 친정에서 데려온 조카들의 겨울옷이라도 지어주고 나면 정말 돈을 아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땅을 사주었으니 떳떳하게 오라버니 집에 머무를 수 있겠다 싶지만 오라버니가 어디 재취자리라도 구해서 시집을 보내려고 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본이는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더욱 열심히 소설책을 읽었고 그게 남들 보기에는 자칫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수일이 느지막이 일어나 어슬렁거리는 본이를 보더니 혀를 찼다. 본이가 사준 땅에 뒤늦은 보리 파종을 끝낸 터라 여유가 있었다.


“너는 지금이 몇 식경인데 이제야 일어나 돌아다니니? 그러잖아도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이 꼴로 집에 와 있는 것이 남부끄러운데 네가 이런 행실을 보이면 다들 뭐라고 하겠니?”


본이는 오라버니가 남부끄럽다는 말을 쉽게 하는 것을 보고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오는 것을 느꼈다. 본이 딴에는 오라버니네 가족을 살렸다는 자부심에 차 있는데 오라버니가 본이를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기가 막히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오라버니에게 싫은 소리를 하면 틀림없이 유세 떤다는 소리를 듣겠다 싶었다.


“오라버니, 죄송해요. 이제 일찍, 일찍 일어날 터이니 노여움 푸세요.”


본이가 시집가기 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여동생이었던 시절의 목소리로 애교를 부렸다. 하지만 수일의 표정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너는 진짜 시집에서 쫓겨난 것에 대해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는 모양이구나. 정약용 선생은 여동생이나 딸이 남편과 대동하지 않고 친정에 오면 아무리 먼 길을 왔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게 당장은 매몰찬 것 같지만 집안의 위신을 세우고 가풍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하셨다. 나도 그랬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눈만 퀭하던 수일의 얼굴은 그동안 살이 올라 보기 좋았다. 허옇게 버짐이 피고 긁어서 피가 나던 손등도 가라앉아서 예전의 모습이 돌아와 있었다.


오라버니뿐만 아니라 언니도 배가 차고 등이 따뜻해지자 예전의 고운 심성을 되찾아 집안에 웃음소리가 종종 나왔다. 본이는 오라버니가 지금 그것을 부인하고 싶은 것일까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순이가 오늘 아침 목을 매 자살했다더라. 연순이도 너처럼 이혼당하고 친정으로 돌아왔는데 집안에 누가 되어서 죄송하다며 목을 맸다. 연순이는 부끄러움을 아는데 너는 어찌하여 이리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소설책 나부랭이나 읽으면서 밤을 지새운단 말이냐. 동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생각 좀 해봤니. 벌써 연순이 같이 현숙한 며느리를 내쫓은 그 집안사람들에 대해 말들이 많다. 하지만 누구도 네가 쫓겨난 것에 대해 동정하는 사람은 보지를 못했다. 도대체 네가 어떻게 보였기에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이러한 것이냐?”


더는 이런 말을 얌전히 듣고 있을 수 없어진 본이가 허리를 곧추 세우고 오라버니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꿈결에 들었던 곡소리는 연순의 부모님이 통곡하던 소리였다. 그러잖아도 요 며칠 내로 이웃에 사는 연순을 찾아볼 계획이었다.


시월이 말로는 바람이 난 남편이 연순이가 나가지를 않는다고 이틀에 한 번꼴로 때려서 몸이 성한 곳 하나 없이 돌아왔다고 했다. 머리가 뭉텅뭉텅 빠져 꽁지 빠진 닭처럼 추레한 모습으로 돌아온 연순이 이야기를 하며 시월이가 눈물을 훔쳤었다. 그런데 지금 오라버니가 본이에게 그런 연순이 만도 못하다고 타박하는 것이다.

“오라버니, 그럼 제가 연순이처럼 목을 매서 오라버니 위신을 살려 드려야 하는 건가요?”


“아니, 이 녀석이 말이면 다 말인 줄 알아? 그런 말이 아니잖아. 집안 망신을 시켰으면 조신하게 행동해야지. 내가 하는 말을 그렇게 고깝게만 받아들이냐? 하여간 여자들의 소갈딱지라는 것이 정말 답답하구나.”


“지금 오라버니가 하시는 말씀은 실컷 때려놓고 아프다고 한다고 화를 내시는 것 같습니다. 칼로 찔러놓고 피 흘린다고 화내시는 것 같습니다. 진짜 부끄러운 사람이 누구인 줄 정말 모르시네요.”


본이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이자 수일의 눈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본이의 부모님은 일찍이 딸의 교육에 힘을 많이 썼다. 현모양처라는 것이 어질 인에서 나오는 것임을 항시 강조하셨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나서 본이의 교육을 맡았던 오라버니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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