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보다 낯선 고향의 이방인
“아씨, 저기 저쪽 역 모퉁이 돌아서 뒷골목에 무엇이 있는지 아세요?”
본이가 오라버니의 포목점을 나와 망연자실 서 있으려니 시월이가 본이의 손을 잡아끈다.
“그걸 내 어찌 알겠느냐.”
“그럼 나를 따라오세요. 아씨 아주 좋아죽을 걸요.”
시월이가 마음 상한 본이를 위로해 주기 위해 나서는 모양이었다. 본이가 좋아 죽을 만한 것은 보나 마다 한 가지뿐이다. 본이는 오라버니의 가게에서 보았던 화려한 비단에도, 누가 봐도 입이 벌어지게 번쩍이는 금붙이에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 사람 아닌가. 시월이가 앞장서고 본이가 뒤따라간 골목길에는 작은 책방 하나가 있었다.
작지만 오래된 점포는 아닌 듯 ‘명문 서림’이라는 상호가 반짝거렸다. 책방 안으로 들어서자 자기가 입은 와이셔츠보다 더 허연 얼굴을 한 젊은이가 보였다. 책방 안에 혼자 있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점원이거나 주인일 텐데 손님이 들어가도 흘긋 올려다볼 뿐 관여하지 않으려는 태도로 자신이 읽던 책만 보고 있다.
본이가 보던 책은 대부분 시월이가 방물장수에게 부탁하거나 장날 난전에서 사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도 아니면 신문을 보고 우편으로 주문해 다른 집에서 받아오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처럼 책이 많은 책방은 처음 와보는 것이다.
책꽂이에 있는 책들을 보자 문득 화초장 안에 있던 소설들이 떠올라 마음이 아릿했다. 책꽂이에는 말로만 듣던 세계문학 전집이 꽂혀있었다. 1번이 단테의 『신곡』이고 2번은 『데카메론』, 20번은 『보봐리 부인』, 30번은 뒤마의 『춘희』였다. 본이는 떨리는 손으로 『죄와 벌』을 훑어보고 『주홍글씨』를 넘겨보았다.
“아씨, 어때요? 좋은 책들인가요? 아씨가 읽을 만한가요?”
시월이는 본이가 펼쳐놓은 책장 부분을 들여다보느라 연신 목을 길게 빼고 넘겨다본다. 본이는 눈을 반짝이며 진짜 보고 싶었던 책들이라고 탄성을 질렀다. 물들이지 않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머리를 얌전히 쪽 지은 구여성이 세계문학 전집을 들여다보며 감탄하는 풍경은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점원의 눈에는 그게 아무리 봐도 우습게 보였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어디 감히 태서문예신보 추천의 세계문학 전집을 기웃거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틀림없이 겨우 글이나 읽을까 말까 한 여자들이 꼭 허세 삼아 저런 짓을 한다. 책에 공연히 손때 묻히는 것을 볼 수 없었던 점원이 일어나 본이와 시월이의 등 뒤에 섰다.
“혹시 찾으시는 책이라도 있습니까?”
깜짝 놀란 본이가 뒤돌아보니 점원이 도와주려는 마음보다는 감시하겠다는 마음이 더 커 보이는 자세로 서 있었다. 본이는 책들 때문에 흥분해서 그러한 점원의 모습에는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좀 더 둘러보고 싶으니 하던 일을 하시라고 했지만 점원은 본이의 손에 들린 책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그 책은 학생들이 상급학교 진학용으로 읽는 세계문학 전집입니다. 부인네들이 함부로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니 저쪽에 있는 책꽂이를 살펴보시지요.”
점원이 가리킨 책꽂이에는 『춘향전』, 『삼국지연의』, 『유충렬전』, 『조웅전』, 『구운몽』, 『장화홍련전』, 『옥루몽』, 『장운풍전』 등의 딱지본들이 꽂혀 있었다. 저러한 책들은 이미 어린 시절에 다 읽었던 구소설이다. 본이는 점원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하고 생긋 웃었다.
“저 소설들은 이미 다 보았습니다. 제가 보고 싶은 것들은 이쪽에 있으니 제가 알아서 골라보겠습니다.”
점원은 그러한 본이의 태도가 마뜩잖은지 자꾸만 따라붙는다. 보다 못한 시월이가 점원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우리 아씨가 됐다고 하니까 저기 가서 당신 일이나 보셔!”
어린 계집아이가 성난 강아지처럼 대들자 점원의 입이 샐쭉해졌다. 본이는 더 그곳에서 시끄럽게 하느니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제가 보고 있는 신조사 세계문학 전집 전권을 사면 집으로 가져다주시겠지요?”
“네?”
“집은 이곳이 아니라 연기면인데 가능할까요?”
서점을 나서는 본이를 보면서 점원은 조치원에도 보봐리 부인이 하나 나셨다고 투덜댔다. 본이가 낸 세계문학전집의 값은 점원의 한 달 월급을 넘기는 금액이었다. 제 손으로 할 줄 아는 것은 하나 없으면서 돈이나 써대는 여자들은 결국 말로가 보봐리 부인밖에 더 될까 싶었다.
더군다나 보봐리 부인의 인생을 망친 것도 소설책 아닌가 말이다. 그런 점원의 시선을 등 뒤에서 느낀 본이가 작은 오라버니의 말을 떠올렸다. 네가 가진 것이 너를 지킬 것이라 했는데 본이가 가진 것이라고는 마음에 품은 이야기밖에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