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돈의 힘

타향보다 낯선 고향의 이방인

by 은예진

손님이 좀 뜸한 시간이 되자 오라버니와 올케가 겨우 늦은 점심을 먹는다. 같이 먹을 것을 권했지만 본이나 시월이나 밥이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밥을 먹으면서도 수호는 아내에게 기모노가 몇 벌 필요한지, 비단은 무엇 무엇이 떨어졌는지 이야기하느라 본이에게 시선을 돌리지 못한다. 본이는 인사는 하였으니 돌아가야겠다 싶어 슬그머니 일어났다. 그제야 동생 생각이 났는지 수호가 한 마디 던졌다.


“너, 그냥 친정나들이 온 것은 아니지?”

“네.”

“네 서방이라는 놈 얼굴을 보니 그러게 생겼더라. 그래 네 시부모가 위로금은 좀 챙겨줬느냐?”


동생의 안부는 관심 없는 듯 돈 이야기부터 꺼내는 오라버니가 고까워진 본이가 수호와 똑같은 어조로 대답한다.


“오라버니한테 신세 지지 않을 만큼은 됩니다.”


“그럼 그 돈 우리 가게에 투자해라. 너도 같이 나와서 장사도 배우면 혼자 살기 어렵지 않게 될 거다. 세상 어떤 것보다 스스로 돈을 벌지 못하는 사람은 비겁해지는 거다. 네가 비록 여자지만 스스로 돈을 버는 사람이 되면 아무도 너를 하찮게 보지 않을 것이다.”


수호는 동생에게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젓가락을 빠르게 놀리며 말을 잇는다.


“수일이 형님은 나보고 부끄럽지도 않으냐고 하지만 나는 형님이 부끄럽다. 제 가족도 건사하지 못하는 주제에 나라와 민족을 걱정한다는 꼴이 우습다. 조선도 결국 가난해서 이 꼴이 난 것인데 그걸 모르고 입만 살아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너는 그런 형님 말 듣지 말고 여기서 일해라.”


본이는 대답하지 못하고 수호의 옆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동생과 말을 하면서도 오라버니의 눈은 끊임없이 들어올 물건과 나갈 물건을 맞추고, 받아야 할 돈과 지급해야 할 돈을 계산하고 있었다.


“큰 오라버니가 오라버니 도움은 받지 않았지만 그래도 제 도움은 받아들였습니다. 그나마도 올케언니가 무조건 받았으니 그리된 거지만요. 윤씨네 논이 나온 것이 있어서 그걸 급하게 샀습니다. 보리농사 지을 때까지 먹을 곡식이랑 해서 아쉬운 대로 굴뚝에 연기는 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럼 네 돈을 몽땅 그 집에 쏟아부었더냐?”

“그건 아닙니다. 시어머니가 집 한 채 값은 되게 챙겨주셔서 조금 남았습니다.”


“다행이다. 네가 결정한 일이니 내 더 뭐라 하지는 않겠지만 혼자된 마당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한다. 결국은 네가 가진 것이 너를 지켜줄 것이다.”


수호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 없었다. 그런데도 좀 전에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던 계집아이를 생각하자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오라버니는 어린 계집아이 팔아서 오라버니를 지키시는 겁니까?”


본이 쪽은 보지도 않은 채 밥을 먹으며 말을 하던 수호가 깜짝 놀란 듯 숟가락을 멈추었다.


“너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누구를 팔아?”


“설마 아까 울며 따라 나가던 기모노 입은 계집아이를 못 보셨다고는 안 하겠지요? 그 어린것을 늙은 왜놈에게 팔아넘긴 것은 오라버니가 아닌가요?”


“네가 말이면 다 말인 줄 아는 모양이구나! 내가 비록 일본인들을 상대로 돈을 벌지만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그 아이 부모들은 같이 굶어 죽느니 시집가서 사는 것이 낫겠다 싶어 결정한 일이다. 솔직히 말해서 네 남편처럼 조강지처 쫓아내는 사람이랑 어린 계집아이 후처로 들이는 일본 사람 중 누가 나쁜 놈이냐?”


“오라버니, 그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왜? 말이 되지 않느냐?”


본이가 수호에게 한 발짝 더 다가서며 눈에 힘을 주자 재빨리 올케가 끼어들었다. 올케는 눈이 부시게 화려한 비단 앞으로 본이를 끌고 가 옷을 한 벌 해주겠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올케가 그중 가장 눈에 띄는 붉은색 비단을 가져다 본이의 어깨에 걸쳤다. 어지간하면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없는 빛깔이었다.


잘 익어서 한입 베어 물면 단맛이 입안에 가득 퍼질 것만 같은 자두색 같기도 하고 사랑에 빠져 달아오른 처녀의 뺨 같기도 한 색이었다. 하지만 본이는 비단을 쥔 올케의 손을 차갑게 걷어내며 마음만 받겠다고 말했다.


갑자기 손님이 들이닥쳐 가게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올케는 본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님들을 향해 달려간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시월이와 본이는 서로 눈길을 마주치고 슬그머니 가게를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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