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보다 낯선 고향의 이방인
교육받은 대로라면 지금 본이는 오라버니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 조심스럽고 얌전하게 반성해야 맞는 것이다. 그런데 본이는 어진 것만이 잘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라버니가 억울한 처지를 견디지 못하고 목을 맨 연순이가 열녀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을 듣자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에 쌓아왔던 어떤 것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호 오라버니 말대로 나를 지킬 수 있는 것은 내가 가진 것일 터인데 본이는 자신을 속였다.
곤궁한 처지에 놓인 오라버니를 도와주는 어진 동생 노릇을 한 것은 결국 오라버니 그늘에서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드러내놓고 계산을 한 것은 아니지만 착한 동생을 하였으니 남편 없는 본이가 오라버니의 보호를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안이한 생각이었는지 지금 수일이가 보여주고 있다.
“너 지금 내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냐?”
“네, 부끄러운 사람은 제가 아니고 오라버니 맞습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우리 집안의 가장인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 앉으려고 하는구나. 네가 지금 돈 몇 푼에 오라버니를 만만하게 보는구나.”
“아닙니다. 저는 단지 오라버니가 제가 어떤 연유로 쫓겨나게 되었는지 다 알면서도 부끄럽다고 표현하시는 것에 화가 났을 뿐입니다. 억울한 사람이 화내는 것도 오라버니를 무시하는 일인가요? 왜 여인네들은 억울하게 쫓겨나고도 목을 매야 하는 건가요? 잘못은 남자들이 했는데 왜 여자들이 죽어야 하나요? 말씀 좀 해보세요?”
본이의 목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조카들이 놀란 눈으로 달려 나왔다. 올케는 말다툼이 길어지면 오라버니만 망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본이에게 어서 잘못했다고 빌고 들어가라며 잡아끌었다.
수일은 아마도 마음속으로 제발 들어가라고 사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본이는 자기가 오라버니에게 대드는 것이 연실이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라도 되는 양 연실이를 생각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오라버니가 본이의 뺨을 향해 손을 날렸다.
한 대, 두 대 날아가는 수일의 손에는 동생의 도움으로 배를 불리기 된 오라버니의 자격지심이 담겨 있을 것이다. 세 번째 손찌검에 본이가 바닥에 쓰러졌다. 시월이가 재빨리 본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시월이는 제 몸으로 본이를 감싸고 방으로 들어갔다. 시월이의 입에서 계속해서 “큰서방님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시월이는 본이가 하지 않는 사과를 자신이라도 해야 이 상황이 마무리될 것 같았다.
기차에서 내려 경성역에 발을 디딘 본이와 시월이는 얼마 전에 새로 지은 역사의 규모에 입을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붉은 벽돌로 지은 경성 역사의 일 층은 르네상스 시대 궁중 양식을 따라 중앙 홀 바닥을 화강암으로 깔았으며 벽에는 인조석을 붙였다. 건물 안에 있는 귀빈실에는 박달나무 마룻바닥을 깔아 고급스럽게 보였고 피아노 선율이 흐르는 양식당도 있었다.
화려하고 넓은 역사 안에서 도대체 어느 방향으로 가야 출구를 찾을 수 있을지조차 막막한 형편이었다. 결국 본이와 시월이는 사람들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조치원역에서 역 주변의 번잡스러움을 경험했던 터라 경성역사 밖의 소란스러운 풍경에 놀라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걸음걸이가 서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디를 봐야 할지 알 수 없어 시선을 고정하지 못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누가 봐도 경성에 처음 온 촌색시였다. 수일과 한바탕 난리를 겪은 본이에게 수호는 일본을 오가며 장사를 한다는 오십 대 남자의 후처로 들어갈 것을 권했다.
남자가 돈이 얼마나 많은가에 관해 이야기하는 올케의 눈을 본 본이는 그날로 조치원을 떠날 것을 결심했다. 경성에 가서 간호부 일을 배우면 최소한 애가 다섯씩이나 있는 늙은이 후처로 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시월이를 책임질 형편도 되지 못하고 공연히 데리고 다니면 고생만 시키는 것 아닌가 싶었다. 어린 시절부터 시월이가 없는 삶은 생각해보지 않았던 터였지만 그렇다고 죽을 때까지 시월이와 같이 살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본이가 시월이에게 조치원에 남을 것을 권하자 울며불며 매달렸다. 아씨 가는 곳이라면 지옥 끝까지 따라갈 것이라며 자기도 돈벌이를 할 수 있을 테니 데려만 가 달라고 하는 시월이의 말에 본이는 마음 한편 안심이 되었다. 말은 조치원에 남으라고 했지만 실제로 시월이 없이 혼자 경성에 가는 것은 두렵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조치원에서는 어쩌다 한두 대 보이던 자전거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자전거를 피하면 인력거가 나왔고 인력거를 피하면 전차까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내딛는 본이와 시월이를 향해 짐꾼들이 휘파람을 불며 놀려댔다. 어이 촌색시들 그렇게 티내면 누가 잡아갈지 알 수 없는데, 하며 소리 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슬쩍 다가와 어깨를 치고 어디까지 가느냐며 느물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본이는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호랑이 굴에서도 살아남는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한걸음, 한걸음 집중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희롱하는 짐꾼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앞만 보고 걸어가다 보니 문득 장옷이 생각났다.
유성준의 몸을 덮어 주었다가 성빈관에 두고 온 이후로 장옷을 쓰지 않았다. 이럴 때 장옷이라도 있었으면 무례하게 훑어대는 남자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을 터인데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장옷은 지금쯤 여관에서 일하던 아이의 치마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