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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보 Dec 17. 2021

10% 남은 배터리

평범한 하루의 특별함

회사는 일산, 집은 인천이다. 멀다고 생각하겠지만 전 회사까지 1시간 30분 정도 걸리던걸 생각하면 이쯤이야 눈감았다 뜨면 도착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게다가 자동차를 이용하면 20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니 생각보다 먼 수준은 아니다. 다년간 먼 곳으로 직장을 다니다 보니, 1시간 이하의 거리는 오히려 가까워 보이는 착각까지 든다. 그래서 지하철과 버스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 나에게 핸드폰과 에어 팟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 되어 있었다. 전날 늦게 잔탓인지 평소 일어나는 시간보다 늦게 일어났는데, 그것이 화근이 되었나 보다. 아침을 먹고 씻고 준비하는 사이 이미 버스는 내가 타는 곳에서 두정거장 밖에 남지 않았고, 후다닥 챙겨 나온 핸드폰에는 초록색이 아닌 빨간 실선으로 그려진 줄 옆에 그려진 10% 라는 숫자와 케이스에 넣고 잤다고 생각했던 에어 팟 은 충천되지 않았던 본체 때문에, 남은 배터리는 20 퍼 남짓..  


"아니 분명 충전했는데.."


횡단보도 건너편 정류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다, 재택근무가 풀려서 출근하는 사람이 많았던 걸까 아니면 월요일이라서 9시에 출근하는 분들이 늦어서 버스를 타는 건가..라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때쯤 버스가 도착했다. 한 명 한 명 올라탈 때마다 딱딱한 의자의 느낌들을 고스란히 받을 내 몸을 생각하며 버스에 올라탔다. 50석 남짓되는 좌석에 봉긋 솟아 있는 모양이 어릴 적 망치로 신나게 두둘 기던 두더지의 머리와 비슷해 보였다. 하나 둘 아니 족히 수십 명은 되어 보였다.


"내가 앉을자리는 있겠지?.."


한발 움직이면 뒤로   없는 일방통행 같은 통로에서 조심스럽게 한걸음 한걸음 내딛고 있었다. 다행히 끝에서  번째 창가 자리에 사람이 없는  확인하고는  발걸음이 확신을 얻어 툭툭 소리를 내며 걸었다. 자리에 털썩 앉아 내리쬐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커튼을 치고 안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 다시 켜봤다. 분명 맞다. 빨간 줄에 8%.. 배터리가 없는 것이..  와중 배터리는   줄어들어 한자리 숫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앞으로 1시간 버스에서 내려서 다시 걸어서 회사까지 들어가야 하니까 최소 1시간 10분은 버텨줘야 했다. 오른쪽 검지 손가락으로 알림 창을 슥내려 저전력 모드로 바꾸고 화면의 밝음을 가장 어두움으로 맞춰놨다. 어두운 버스 안이었는데도 화면이  보이지 않았다.  상태로는 웹서핑도   없고,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에어 팟으로 노래를 들으면서 전날 미처 채우지 못한 잠을 채우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달리는 버스에서 자는  어디 그렇게 쉽나 출근시간대라 신호대기는 길어지고, 기사님의 엑셀과 브레이크 밟는 리듬에 따라 앞뒤쪽으로 몸을 움직이다 보면 잠을   없어 이내 눈이 다시 떠지곤 했다.  늘어져 있던 머리의 무게를 전부 감당해야 했던 목은 빳빳해져 뻐근했고,  옆사람 때문에 움츠러든 몸을 제대로 피지도 못하는 답답한 상황에서 차라리 목을 들어 커튼을 살짝 들어 밖을 봤다.


아니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흐른 거야?


내가 입사하고 흘렀던 시간만큼 이나 변한 바깥 풍경을 보며   봤던 만큼의 탄성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영상을 찍을 배터리도 없고, 귀에서 잔잔 하게 흘러나와  듣고 있는 노래를 굳이 핸드폰을 꺼내서 건드릴 필요는 없어 보였다. 김이 서려있는 창문을 손으로 슥슥 지우고는 차가운 유리창에 얼굴을 맞대고 창밖을 바라봤다. 아침햇살이 떨어져 그림자 져서 어두운 마을 한편을 보기도 하고, 파스텔톤 맑은 하늘에 어디로 날아가는지 모를 날갯짓하는 새들을 보기도 하고, 이제는 수확이 끝나 황금색으로 빛나는 논을 보기도 하고,  여름을  버텨내고 한껏 멋을  단풍나무 하나하나를 보기도 하고, 가을 만이   있는 향기와 채취가 맞대고 있는  피부에 전해 지는듯했다. 그날만큼은 버스를 타며 봤던 영상만큼이나 예쁘고, 내가 좋아하는 책에 있는   문장의 설명보다  명확했다. 매번 커튼을 치고 어둠  밝게 빛나는 영상을 봤던 날들과는 다르게 아침햇살을 따뜻했고, 빛을 머금은 단풍들은 흔들릴 때마다 내가 출근하는 길을 반기는 것처럼 흔들렸다.  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그날의 출근 시간만큼은 나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다. 차가운 유리창에 볼을 맞댔지만 마음만은 따듯해져 도착할 때까지 한동안 밖을 바라보았다.


그날이 특별했던 이유는 비슷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당연한 것'에 대해  의미를 두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한 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는 건 곧 지루해진다. 1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계절은 당연하고, 내가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하고 퇴근하고 밥을 먹고 자는 것 또한 하루 일과 중 당연한 것 에 들어가고, 아침과 저녁은 하루 24간을 사이에 두고 12시간씩 사이좋게 당연하듯이 돌아간다. 아침에 뜨는 해가 당연하듯 그런 하루 속에서 특별함은 뜻하지 않게 찾아온다. 어제와 같은 오늘, 매번 같은 풍경, 이제는 결코 그날처럼은 느낄 수 없을 것 같다. 그날 내가 느꼈던 풍경을 다시는 볼 수도 없을 것이다. 나는 이전과 똑같이 배터리를 가득 채우고 출근하고 버스에서의 대부분 시간을 핸드폰으로 때우곤 한다. 바깥 풍경을 어쩔 수 없이 보는 일도 만들지 않는다. 다만 가끔 그날을 생각하며 얼굴을 들어 바깥 풍경을 본다. 당연한 오늘이 특별해지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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