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 친구들과 강원도 여행을 갔다. 딱히 갈 곳없던 우리는 한 독립책방에 가게되었다.
외관이 그림 속 집처럼 생긴 곳이었다. 잔디밭 위에 세모세모한 집. 그 책방은 어울리지 않게 아파트단지에 있었다.
나는 책방에 들어서기 전에 다짐했다. 오늘 여기서 가장 인상깊은 책을 한 권 사리라.
여행지에서의 작은 충동구매는 기분을 낫게 한다.
우리는 각자 책을 뒤적인다. 친구1은 그림책을 뒤적였고 헤어진 결심의 대본에 흥분했다.
친구2는 여기저기 걸어다녔고 작고 귀여운 문구류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잡지를 봤다. 필로소피라는 철학잡지. 흥미로운 글 한두개를 정독한 뒤 오늘 내가 사야할 책은 바로 이 잡지라는 90%의 확신이 들었다. 마음의 결정을 한 후 소설코너와 에세이 코너를 기웃거렸다.
그러다 이상한 책을 발견했다.
ERASER 453. 흰 배경지에 검정색 고딕체가 크게 박혀있었다.
-지우개? 그 뜻인가?
지우개의 표지
책을 펼치자 놀랍게도 이 책은 정말로 지우개에 관한 책이었다.
지우개는 무언가의 은유가 아니었다. 정말 지우개를 소개하고 있었다. 그 연필을 지우는 지우개 말이다.
지우개를 설명하고 그동안 국내에 있었던 모든 지우개를 알려주고 있었다. 지우개의 역사.
안 써본 사람없을 점보 지우개
사진에서 보다시피 이 책은 지우개의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박아놓고, 크기와 성분을 표기하고 있으며, 이 지우개가 언제 처음 나왔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정보를 알려준다. 측정기준 벌크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성의를 표하기 위해 검색을 해봤다.
그렇다고 한다.
뭘까. 이 책은 왜 쓰여졌을까. 지우개 옆에는 연필이 있었다. 주인장은 지우개 옆에 연필을 붙여놨다.
나는 '연필'을 잘 몰랐다. 검색해보니 이 책은 나름 유명한 것 같다. 이 책 역시 연필에 관한 책이다.
'지우개' 책 표지에는 453이라는 숫자가 써있고 이는 1950년부터 화랑고무에서 만든 453개의 지우개를 뜻한단다.
언제나 쓸모와 효용성을 생각하며 살아왔던 나로서는 한낱 지우개 따위의 사진이 전부인 이 책이 신선했다.
솔직하게는 이 책을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졌다.
아니다. 더 솔직하게는 이 책 팔리나?
책은 왜 읽는걸까. 또 책은 왜 쓰는 걸까.
책읽기를 좋아하고, 글도 쓰고 싶은 사람으로서 가끔 이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는 책을 많이 읽으라고 배운다. 왜 책을 많이 읽어야 하지? 정답스러운 대답은 너무 많다.
유튜브에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라고 쳐 보면 영상도 많다.
책은 간접경험이고, 우리의 세계를 확장시켜준다. 또 어휘력도 향상되고 사고력도 증진된다고 한다.
다 맞는 말이고, 깊이 동의하는 바다. 특히 간접경험. 이 세상에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사건과 그 안에 사는 각자 고유한 사람들이 있다. 효율적으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분류하고 일반화하려는 우리의 본능을 넘어서는 구체성과 복잡성이 넘쳐난다. 그 생생하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로 하여금 타자를 이해하게 했다.
그래 그러니까 아무튼 책을 읽으면 좋은 점이 짱많다. 인정.
그러나 책이 만병통치약이 되어 독서하면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투의 자기계발서가 넘쳐나는건 왠지 찜찜하다. 자매품으로 글쓰기가 있다. 글쓰기로 당신의 인생이 바뀔 것이라고.
최근들어 자기계발서 알러지가 심해진 나는 몸서리 친다.
요사이 너무 심심했던 나는 독서모임에 나갔다. MBTI I인 나로서 어지간히 심심하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책을 아주 많이 읽은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젊었을 때 몇년간 책을 몇천권 읽었다고 했다. 와우!
하루에 1권정도는 기본으로 읽었고 더 많이 읽을 날도 있었다고 했다. 그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천권만 읽으려해도 하루1권씩 3년은 읽어야 되며, 몇천권이라는게, 2천권과 9천권은 너무나 다르지만..아무튼 작게잡아 2천권만 되더라도...6년은 필요하지 않은가?!
그가 보여주는 사유의 수준은 감탄스러웠다.
책을 몇 천권 읽어도 저렇다면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A가 소개해준 책에서 포인트를 못잡았는데, 진짜 내용 이해를 못했다기보다 , 그 책이 진짜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한 사유가 불가능해보였다. 즉 아이큐는 있는데 이큐가 없었다. 공감은 고차원적인 지능이다.
그는 혐오의 밑바탕이 될 수 있는 전제를 옹호했다. 이 전제가 어떻게 혐오의 기제가 될 수 있는지 우리는 토론을 벌였지만 그는 계속 맞다고 했다.
또 그가 팬인 모 자기계발서 저자가 돈주고 리뷰랑 평점을 조작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그것마저 능력이라고 말하는 뻔뻔함도 보여주었다.
"설사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A는 당황하여 돈주고 한 것인데도 능력이라구요? 되물었고 그는
"좋은건 아니죠. 근데 그 사람이 그렇게 했다고 능력이 없다고 할 순 없죠. 그리고 그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돈도 실력이야!" 누군가 떠올랐다.
돈도 실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사람도 있겠..아니 많이 있겠지. 나는 사실 이해가 아주 잘된다. 사실 돈이 장땡이지 뭐.
그러나 나는 책을 몇천권 읽었다는 사람이 부정부패를 해도 성공하면 장땡이라는 단순하고 비윤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겉으로 내뱉기까지 하는 뻔뻔함을 보여 조금 당황했다.
그는 책을 몇천권 읽으면서 자기 삶에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현재는 미라클 모닝을 하고있다고 했다. 그는 자랑스러웠고 확신에 차있었다. 그러나 나는 무슨 책을 읽었길래 몇천권을 읽어도 저 모양인지가 궁금했다.
그에게 책을 읽는 이유는 오직 돈많이 벌려고, 성공할려고 그거 하나였다. 돈과 성공은 따라올 수 있겠지만 유일한 목적이 그것일 때 책을 통한 성장은 딱히 일어나지 않는 듯하다.
아 어차피 그에게 인간의 성장=돈이겠지만. (근데 돈을 많이 벌었는지도 모르겠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성공하지 않는다.
멋진 사람이 되지도 않는다. 책은 만능열쇠 키도 아니고 만병통치약도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는 세상에 쓸데없는 책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이 쓰는 글이 종이와 나무를 낭비하는 일일지 생각해 본다고 했다. 나는 이 날 그 말의 현장을 목도했다.
저자는 지우개 453을 집필한 의도에 대해 책의 서문에 설명해주었다. 지우개의 발자취를 따라간 이 책은 신선했다. 그리고 이 책방에서 가장 인상에 남았다.
가장 인상깊은 책을 사리라는 다짐은 지키지 못했다.
나는 결국 필로소피를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