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사건이 국민적 공분을 사면서 일명 ‘박사’는 성폭력 특례법 상 최초로 신상공개가 결정된 범죄자가 되었다. 이 사건은 단숨에 국민청원 300만을 돌파해 역대 최고 청원수를 기록하기도 했고, 여타 성범죄와는 다르게 전 국민적 분노를 샀다. 경찰에 잡히기 전, 절대로 잡히지 않을 것을 확신했던 조주빈과 일당은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는 것에 당황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것은 나름대로는 무척이나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몇 달 전 신림동 강간미수 사건에서 가해자는 결국 주거침입행위로만 처벌받았다. 강간미수 혐의는 적용되지 않았다. 디지털 성범죄와 몰카는 기승을 부리지만 처벌 건수는 극히 미미하다. 이러니 수많은 N번방 운영자들이 자신이 없을 리가.
성범죄로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는 한국 사회를 보며 나는 종종 ‘아 범죄를 저지르라고 장려하는 건가,’ 싶을 때가 많았다. 우리가 분노 섞인 두려움에 떨 때, 가해자들은 ‘거봐 너희들이 암만해봐야 이렇다니까?’라고 우리를 조롱하는 듯했다. 그리고 국가는 언제나 그들의 편인 것만 같았다. 사람은 비슷한 처지에 잘 공감하는 법이다. 나는 성폭력 피해 기사를 마주할 때면 언제나 피해자와 동일시하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그리고 나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은 연대의 직접적인 동력이 되어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게 한다.
이번 사건은 몇몇 쓰레기 같은 놈들의 일탈적 악질 행위가 아니다. 한국 사회 전반에 깃든 강간 문화, 만연한 성적 대상화가 이 사건의 본질적원인이다. 강간은 범죄인데 문화처럼 여겨지는 것. 이 말이 안 되는 생각의 일상화, 이 정도로 뭐. 그 무뎌짐 같은 것이 만들어 낸 사건이다.
몰카를 보거나 단톡에서 외모 평가하는 일, 성매매 정도는 범죄가 아니라 유희가 되는 사회 분위기의 연장선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다만 이번엔 드러났을 뿐이다.
같은 인식에서 비롯된 사건이어도 피해 정도가 클수록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이 사건은 그 정도가 심해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너무 특이한 사건이 갑자기 벌어진 것도, 악마가 벌인 짓도 아니고, 그럴만한 토대 위에서 평범한 인간이 벌인 성범죄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처럼 아이히만은 유대인은 사람 취급 못 받는 게 일상인 사회에서 버튼을 누른 평범한 사람이다.아이히만은 시종일관 말한다. 나는 잘못이 없다고.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다. 당시에 유대인은 그래도 되는 사람이었고 독일인들도 같은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아이히만을 찾아내려 할 필요 없이 각자가 자기나 돌아보면 된다.
97년도 뉴스가 생각난다. 택시 운전사에게 성폭행을 당한 여대생이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성폭행을 당했다는 수치심에 여대상은 범인을 꼭 잡아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압권은 기자의 클로징 멘트다.
수치스러운 삶 대신 죽음을 택한 이양의 선택은 정조 관념이 희박해진 요즘 세태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네?????? 성폭행을 당한 여성이 자살을 했는데, 그 와중에 그녀가 지킨 정조가 칭찬받고 있다. 2020년이라면 누가 들어도 까무러칠 발상이며, 시청자 게시판이 폭파당하고 국민적 사과를 해야 했을 멘트다. 하지만 97년도에 위의 멘트는 공중파 방송에 충분히 나갈 수 있었다. 국민정서와 인식 수준은 위의 멘트를 수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는 위의 멘트를 수용할 수 없다.
이처럼 우리의 인식은 변할 수 있고 그래서 변한다. 물론 그냥 변하지는 않았다. 여타 다른 진보와 마찬가지로, 사회의 전체적 진보와 함께 교육, 어떤 사건, 그에 대한 시민적 합의 등이 오랜 기간 잡음을 일으키며 시민의식이 높아진 것이다. 우리는 사회 속에 살기 때문에 한 사건을 바라보는 그 사회의 패러다임을 받아들인다. 일전의 당연함이 오늘날엔 부끄러움이 되었고, 일전의 장난을 이제는 범죄라고 인식한다. 행위는 같다. 다만 그 행위를 판단하는 우리들의 시각이 달라졌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좀 더 나아갔으면 좋겠다. 시대에 맞는 법이 제정되고 처벌이 강화되는 것도 필수적이지만, 본질적인 것은 사회 구성원들의 기본적인 인식이 변하는 것이다. 그 기본적인 인식이란 여성을 동등한 인간으로 보는 것이다.
함께 분노하며 처벌 강화를 주장하는 댓글 중에 마음을 찌르는 댓글들이 있다.
“판사 네 딸이 당했어도 그렇게 판결했겠냐.”
“판사 네 딸이 당해봐야 정신 차리지.”
판사의 딸. 누군가의 딸인 나는 그 댓글에 공감과 연대감은커녕 불쾌감이 일었다. 그 사람이 극악무도한 범죄자에게 형을 고 따위로 내린 사법부에 분노해서 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의 딸인 나는 그 사람이 당당하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불쾌하며 그 댓글이 추천을 받고 있는 것에 좌절했다.
판사의 뒤떨어지는 성인식을 깨우치기 위해 왜 딸이 피해자가 되어야 하는가. 분노의 표현방식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여성을 피해의 상징으로 여기는 발상은 실로 자연스럽다. 여성은 성폭행을 당했어도 가족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명목으로 살해당한다. 전시상황에 승리국의 남자는 승리의 트로피로 패국의 여자를 집단 강간한다. 이슬람의 명예살인이 이슬람의 문화라 친다 해도 전시 강간은 어느 나라 따질 것도 없이 일반화된 것으로 역사가 증명한다.
사실 한국의 위안부 생존자들은 50년간 침묵했다. 왜? 그들이 피해를 당했음에도 민족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명목으로 오히려 사회에서 매장당했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명예살인과 다른 점은 한국은 오늘날에 와서는 드디어 위안부 생존자를 비판하는 기괴한 패러다임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이제 위안부 생존자를 비난하는 사람이 무개념 취급을 받는다. 한국사회 인식은 그렇게 변했다.
전시 강간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이기 때문에 발생한 일탈적인 사건이 아니다. 일상에 스며있는 강간 문화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좀 더 극적인 형식- 집단강간으로 표출되는 것뿐이다. 오늘의 N번방 사건도 마찬가지다. 특별히 악질적인 인간이 벌인 악마의 소행이 아니라 일상적 성 문화의 연장선이다. '유대인에게는 그럴 수도 있지'라는 일상의 토대 위에 아이히만이 나온 것처럼.
여성은 물건이기에 승리국에게는 트로피가 되고 패국에게는 치욕의 상징이 되거나 민족의 아픔의 담지자로서 역할이 맡겨진다. 이번 사건에서 드러나는 N번방 가해자들의 심리를 분석한 전문가들의 말은 비슷했다. 그들이 여성을 동일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 그렇기에 이런 잔학한 행동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판사의 딸이 강간당해봐야 판사 네가 정신 차릴 것이라는 말에 담긴 함의에도 여성은 동등한 인간이기보다는 대상이라는 인식이 담겨 있다. 처벌은 판사를 향하지 않고, 판사의 소유물로 여겨지는 어린 딸로 향한다. 전시 강간이나 명예살인의 기본 전제는 여성을 그냥 물건으로 보는 것이다. 좀 더 유하게 표현하면, 여성을 동등한 존엄성을 가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인식이 모든 성폭력, 성범죄의 원인이다. 조주빈은 손석희에게 사과했지만 피해 여성들에겐 사과하지 않았다. 왜?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해당 댓글을 달고 공감한 사람들이 N번방 가해자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그 기저에 깔린 여성에 대한 인식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여성을 독립된 인격체로, 인간으로 보지 않는 시선이 담겨 있다. 나쁜 마음을 먹어서라기보다 자연스럽게. 강간 문화, 성적 대상화가 일상화되었다는 것은 이런 의미다.
현실은 복잡하고, 늘 정도의 차이라는 것이 있으며, 인식이 다 행동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동등한 존엄성을 가진 인간이다.’라는 말이 갖는 의미를 깊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 )도 동등한 인간이라고 생각해.’라고 말하면서 차별의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많다. 고기 먹는 채식주의자가 "난 채식주의자야" 말 한마디 한다고 채식주의자가 되는 게 아닌 것처럼 전 차별하진 않지만요,~~ 한마디 덧붙인다고 정의로운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나도 모르는 새에 내가 갖고 있는, 약자를 타자화시키는 인식이다.
분노할만한 일에 분노하는 것은 중요하다. 며칠 만에 청원 건수가 몇 백만 명이 되니 국회와 경찰 검찰 청와대까지 수사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시민들의 분노와 연대는 강력한 힘이 된다. 그러나 분노를 표현하느라 다른 사람을 타자화시킨다면, 그 분노 표현은 안 하는 게 낫겠다. 분노의 표현에도 존중이 필요하다. 사실 존중이라는 표현은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실은 그 사람의 표현에 그 사람의 인식이 묻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런 말을 하기가 눈치라도 보이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창피해서라도 차별과 타자화의 언어를 감히 떳떳하게 사용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정착되었으면 좋겠다. 속마음이 어떨지언정 눈치라도 보았으면 좋겠다. 자살한 여대생에게 정조관념 운운한 것이 2020년 우리 눈에 한심해 보이는 것처럼, 1997년보다는 진보했을 우리가 스스로를 정의롭게 여기며 2030년에는 부끄러울 말과 행동들을 하진 않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일상의 그 문화에 내가 일조한 것은 없는지 생각해 볼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