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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엄마 May 09. 2020

나답게 육아 #2. 부모됨의 준비  

그 시작은 원가족으로부터의 독립 

 부모님은 늘 맏이는 맏이다워야 한다고 했다. 어느 날은 부모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방에 숨 죽이고 있다가 화장실을 가는데 거실에 있던 엄마가 갑자기 쳐다보며 “맏이가 되어 그 모양이니 동생들도 그렇지.”라고 하셨다. 억울했지만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아 잠자코 방으로 돌아왔다.


 출산 후 산후우울증을 앓았다. 일주일간 조리원에 있다가 집으로 왔는데 이 주간 친정엄마가 친정에서 집을 왔다 갔다 하시며 몸조리를 도와주셨다. 남편이 출근한 후 오전 10시쯤 오셔서 오후 4시쯤이면 가셨다. 엄마가 가시고 나면 9시쯤 남편이 올 때까지 아이와 단 둘이 있었다. 안겨서만 자던 아이는 어스름한 저녁이 되면 너무 심하게 울어 잠시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창문 밖으로 해가 지는 장면을 보며 힘들어 참 많이도 울었다. 당시엔 저녁나절이 힘들다고, 조금 더 있어 달라고 엄마에게 말하지 못했다.



  두 가지 모두 나의 과거이다. 나는 남아선호 사상이 심한 조부모님 아래에서 자란, 둘째 아들인 아버지의 첫째 딸이다. 아버지는 공부를 더하고 싶었지만 장남만 지원해주던 당시의 시골 분위기에 공부를 더 하지 못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들은 바로는 장남이었던 큰아버지는 여러 차례 시도한 고시공부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방송국에 입사하셨고, 상고를 졸업한 아버지는 취직하고 아래로 줄줄이 있던 어린 동생들의 용돈을 줬다고 한다. 엄마에게서는 결혼 후 시동생들의 대학 등록금을 내줬던 이야기도 스치듯 들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장남이라는 이유로 온갖 특혜를 다 받은 것 같은 형이 동생들을 좀 챙기기를 바랐던 거 같다.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당시 교사였던 큰어머니를 대신해 빈 집에 열쇠로 열고 들어가 제사 준비를 해 놓으면 수고했다는 어른들의 인사는 큰어머니가 듣던 것이 꽤나 서운하게 마음속에 쌓여 있었던 거 같다. 몸이 약해 유산도 여러 차례 되었는데 내 동생을 임신하고 부른 배로 재래식 아궁이에 몸을 숙이고 시어머니 밥을 지었을 엄마를 생각하면 같은 여자로서 짠 한 마음을 넘어 분노가 들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자라면서 엄마 편이었다. 선과 악으로 나눠서 외가 식구들은 좋은 사람이고, 친가 식구들은 내게 나쁜 사람이었다. 그 공식이 더 분명해질 수밖에 없는 일련의 사건들은 내가 자라는 동안 계속되었다. 엄마는 상대적으로 가여운 사람이었고, 그래서 엄마가 하는 말은 내게 중요하고 의미 있는 말로 마음에 남았다.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는 나는 엄마를 덜 힘들게 해야 했다. 물론 학습지를 미루고, 비타민을 몰래 변기에 버리며 그 또래의 아이들이 하는 사고는 쳤으나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는 엄마의 눈치를 보고, 엄마가 집을 나가면 나도 무서웠지만 이미 겁에 질려있는 동생 때문에, 무서움이 현실이 되는 것이 싫어 괜찮은 척 동생을 데리고 집을 지켰다. 시댁과 아버지에게는 약자였던 엄마는 내게는 강자였다. 엄마에 대한 연민으로, 또는 강압적인 엄마의 태도에, 엄마의 매질에 나의 가치관은 혼란스러웠고 왜곡되었다.

그렇게 자란 나는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는 부모님에게조차 도와달라고 말하지 못하고, 부모님이 말씀하셨던 가치들을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거부감이 들었다. 사랑을 받을 수 없다면 지적을 받지 말아야 했다. 사람들에게서 지적을 받지 않으려면 완벽해야 했다. 나는 내가 완벽할 수 없도록 하는 세상이, 나 자신이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는 태어난 아이까지도 미웠다.


 아이가 네 살 무렵 남편의 권유로 부모교육을 듣게 되었다. 듣지 않을 이유는 열 가지였지만 들어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로 수강했고, 그 전엔 막연히 “나는 정말 이상해.” “내가 까칠하고 예민해.”라고 생각하고 불편했던 것들의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특히 많은 주제 중에서 가장 나를 힘들게 했고 아직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것이 독립, 바로 부모로부터의 독립이다.



 세상에 태어난 아이가 가장 처음으로 관계하는 것은 바로 부모이다. 사람을 떠나 살 수 없어 흔히들 이야기하는 “사회적 동물”인 사람은 관계 안에서 “나”가 되고 “너”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 관계라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부모교육을 들을 때 수업에서 비유되었던 것처럼 관계라는 것은 난로와 같다. 너무 가까우면 뜨겁다 못해 화상을 입고, 너무 멀면 춥다. 다만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가까이 두고 싶거나 멀게 두고 싶음은 다를 것이다. 박경순 교수님은 <엄마 교과서> 저서에서 “인간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는 스스로 독립해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처럼 우리는 우리를 돌보아주는  누군가 없다면 혼자서는 살아낼 수가 없다. 나는 엄마라는 난로를 가까이 두고 싶었다. 그래서 좋든, 싫든 우리를 돌봐주는 그 누군가의 생각을, 방식을 그리고 주변과 나에 대한 평가까지도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는 어렸기 때문에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별할 능력이 부족한 채로 말이다. 그렇게 자란 우리가 아이를 돌보는  누군가가 된다.

 나의 아버지는 시골 증조할아버지 집에 맡겨져 땔감 나무를 한 짐 해놓고서야 밥을 한 그릇 먹을 수 있었던 환경에서 자랐다. 그래서 나와 동생들에게 밥을 굶기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셨다. 내가 어릴 때 시험 점수가 엉망일 때면 “이렇게 할 거면 일찍부터 공장을 다녀라.”라는 말이나 “중학생이면 다 컸으니 신문을 돌려라.”라는 말은 그런 아버지의 성장 배경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그 말을 하신 것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지만 추측하건대 한창 클 나이 배가 고팠고, 나이에 비해 고단했던 집안일을 해야 했으며, 하고 싶었던 공부는 충분히 하지 못했던 억울함이 가슴 저 깊은 곳에 남아 있다가 한 말씀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심리학 책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내면 아이>로 어른인 아버지가 한 말이 아니라 어른의 모습을 한 내면 아이가 다른 아이인 나에게 한 말이었다고. 그 말이 듣기 힘들었던 나는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가 방을 치우지 않고, 하루에 해야 하는 문제집을 해 놓지 않을 때면 나도 모르게 “엄마는 네 나이 때 할머니 도와서 매일 청소하고 다 했어. 그런데 넌 엄마가 청소 다 해놓고 기다리는 집에 와서 그것도 못하니?”라고 쏘아붙였다. 이게 뭐란 말인가. 아버지의 입에서 들었을 때 막막해서 무섭고, 속상하고 억울했던 말을 나는 안 하겠다고 해 놓고선 형태만 조금 비틀었을 뿐 그대로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은.



 세상에는 완벽한 부모는 있을 수 없다. 정도의 차이지만 우리는 누구나 제각각 부모로부터 사랑만큼이나 많은 상처를 받으며 자라 어른이 된다. 그리고 자녀와 함께하는 생활을 앞두고 있거나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출산과 육아에 앞서 나의 부모로부터의 독립 정도를 돌아봐야 한다. ‘독립’이라고 하면 내가 쓸 돈을 내가 버는 것이나, 집을 떠나 혼자 또는 배우자와 사는 것 등의 외형적인 형태를 바로 떠올릴 수 있다. 이보다 좀 더 깊고 내밀한 의미의 독립도 있는데 그것은 부모의 도움 없이 결정하고 관리하는 기능적인 독립, 부모의 생각과는 별개로 자신만의 가치관이나 신념을 확립하는 태도적 독립, 부모의 인정이나 지지를 받지 않아도 자유로운 정서적 독립, 부모에 대한 반감, 죄책감, 책임감 등의 감정에서 자유로운 갈등적 독립이 있다. 부모교육에 참여하여 이런 독립의 내용을 접하게 되었고 나는 서른 살이 넘도록 독립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진작부터 돈을 벌었고, 결혼을 내가 번 돈으로 했으며, 부모님께 용돈을 들여왔었던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부모님의 칭찬에 굶주려 있었다. 내 일은 내가 스스로 잘 해내서 ‘역시 너는 잘한다.’라는 말이 듣고 싶었다. 나는 번 돈을 날 위해 쉽게 쓰지 못했고 아끼면서 부모님께는 용돈을 드렸다. 냉장고를 바꿔드리고, 김치냉장고를 사드리고, 소파를 사드리면서 인정받으려 했다. 결혼 초 재무 설계를 받을 때에는 동생들이 결혼할 때면 천 만원씩은 해줘야 하니까 준비해야 한다는, 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리인 계획도 세웠다. 부모님들로부터 늘 들어왔던 맏이 운운하는 말로 인생에 있어 책임감이라는 것을 매우 중요한 가치로 생각했다. 그렇게 애쓰며 살았지만 동생과 단둘이서만 여행을 가던 엄마, 다리 화상을 입었을 때 전화하니 “나더러 어쩌라고.” 라며 전화기 저편에서 말하던 엄마의 말에 상처 받고 상처 받으며 그에 대한 복수로 내 존재를 알리려 또 애를 썼다. 내가 정상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때마다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던 아버지를 미워했고 언젠가 나의 실수로 아버지가 내게 그랬듯 나도 아버지와 말을 섞지 않았다. 끊임없이 부모님께 인정받으려 하고 사랑받지 못한 분노를 터트리는, 나는 시한폭탄이었다.


 나는 뇌관이 살아있는 폭탄이었다. 오래된 학습으로 부모님께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화를 내거나 빈정거리거나 싸움을 전제하고서만 의사표현을 할 수 있었다. 못한 말과 화는 가장 가까운 남편과 아이에게 풀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상처 주고, 돌아서서 내가 미워 울었다. 부모로부터 독립이 되지 않으면 이렇게 원하지 않게 상처를 주고 후회한다. 그마저 더 무서운 것은 상처를 주면서도 상처를 준 줄도 모르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엄마 아빠가 되기에 앞서, 부모역할을 하고 있다면 더욱더 나의 독립 상태를 살펴보아야 한다. 독립되지 않은 나로 인해 내가 받은 상처를 아이에게 다른 형태로 돌려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서 아들이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친정어머니, 나, 아들이 같이 외출했다가 해가 지면서 하늘 전체가 붉게 물드는 장면을 보며 엄마가 아름답다고 하셨다. “나 산후조리할 때 이 시간이 가장 힘들었어.”라고 얘기하자 엄마는 당신도 해 지는 것이 무척이나 좋은 날도, 가슴이 아리게 아픈 날도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산후조리 때 힘들었던 나를 몰랐다며 그렇게 힘들었다면 더 있어줄걸 이라고 하셨다. 이런 건 운이 좋고 감사한 경우다.  중고등학생 즈음이었을까? 나는 등산길에 엄마의 친구가 보는 앞에서 엄마에게 뺨을 맞은 적이 있다. 이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엄마에게 “정말 미안했다.”라는 말을 듣는 것일 거 같다. 나는 오래도록 이 말이 듣고 싶었다. 부모님에게서 “그때 미안했어. 그 일도 미안해.”라는 말. 그래서 그렇게 오래도록 아픈 티를 내고 살았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 일을 꺼내도 부모님은 기억을 못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억을 하신다고 해도 “너는 별 걸 다 기억한다.” 거나 “그럴 수도 있지.” 또는 “네가 얼마나 칭얼거리고 힘들게 했었는데.” 일 때가 많다. 어릴 땐 맞고 울었다면 이제는 상처를 치유하는 힘을 내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럴 수 있는 것이 진정한 ‘독립’인 것이다.


 내가 독립이 되지 않았다는 것,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오 년이 넘는 시간을 힘들어했다. 부모님을 볼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래도 감사해야지.’ 라는 머릿속 소리와 ‘왜 나만. 동생에게는 그렇게 하면서.’ 등의 가슴속 소리가 부딪힐 때마다 스파크가 튀고 불이 붙었다. 두려운 것은 이 것이 끝나지 않아 이렇게 나도 힘들고, 부모님도 힘들게 하다가 어느 날 부모님을 영원히 떠나보내는 일이 있으면 그 뒤의 내 마음은 어찌 감당할까 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두려운 것은 아이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자랄까 봐 라는 것이었다.

 오 년을 앓았다. 그리고 지난해 여름이 지나서야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짐을 느낀다. 여전히 나도 힘들고 수시로 흔들리지만 그런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과거에 울고 있는 나를 볼 때마다 “내가 참 억울했네.”, “아이고 정말 분했겠다.”, “진짜 무섭고 힘들었겠다.”라고 나에게 말해준다. 당시 듣고 싶은 말을 나 스스로 해주면서 어른이 되어 가는 것. 이것이 더 나은 엄마, 아빠가 되는 첫걸음이다. 그래서 우리가 키워야 하는 건 사실은 아이가 아니라 나 자신이다. 이렇게 나를 다독이며 살다 보면 아이도 옆에서 예쁘게 무엇보다도 자신답게 자라고 있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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