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날들. 이렇고 저렇고 그런

by 아니

아들의 사건이 발생하고 삼 주 째다. 일주일은 '착하기만 한 내 아들이' 하는 충격에 휩싸여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혹시나 하고 예상했지만 그렇게 되길 원치 않던 상황으로 일이 정리가 되고, 그때부터는 미움에 휩싸였다. 미웠다. 엄마가 있는 게 싫은 기색 가득한 아들의 은근한 압박에 커피 마신다는 핑계로 자리를 비운 내가 미웠다. 아이가 흥분한 상태인데 누구 하나 따라 나와 달래지 않은 그 장소의 사람들이 미웠다. 맞고 있는 아이에게 나가라고 한 사람들이 미웠다. 지난해 아이가 힘들어할 때 비슷한 아이들을 모아 그들을 위한 시간을 만들겠다는 수녀님에게 '다른 아이들에 대한 역차별'이라고 말한 신부님이 미웠다. 모두가 미웠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내가 모든 것을 예측하고 통제할 수 없음을, 싸우는 아이들을 분리하는 과정에서 떨어뜨려 놓으면 된 거라고 생각했을 사람들, 신앙 공동체라는 기대에서는 벗어났지만 생명 존중에 대한 개인적 가치관이나 사회적 통념에서는 제명이라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음을. 그리고 이 모든 미움의 대상이 결국은 나인 것을 알고 있어서 도망갈 핑계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마음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어지는 날들을 혼자서 울었다. 묻지 않으면 내 마음을 말하지 않았고, 공개적으로 내가 노출되는 자리에서는 담담한 척을 했다. 하지만 양보할 수 없는 부분들, 복음을 읽고 나눔을 해야 한다거나, 다가오는 여름 신앙학교를 원래 계획대로 아이들 통솔을 목적으로 참석할지 말지 등은 냉정하게 잘랐다. 안전하지 않으니 내 마음을 말할 수 없다고, 내가 내 아이를 책임지는 것이 우선이 아니겠냐는 말로 교묘하게 상대의 허점을 노리고 꼬집었다. 울거나, 참을 수 없는 미움에 분노하거나, 내가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젖어 그냥 있었다. 일상을 겨우 겨우 유지하며 점점 더 나는 텅 비어 갔다.


마음이, 생각이 그저 하나이면 좋으련만. 창피한 거면 창피한 것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줬다는 생각에 미안한 거면 미안한 것만, 남 탓을 하려면 탓만 할 수 있으면 차라리 좋았겠다. 이랬다 저랬다 감정의 널을 띄며 나는 나날이 지쳐만 갔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줄 때면, 일하러 가서 근처에서 성당을 발견할 때면 무조건 들어가 기도를 했다. 그간 그냥 아이를 성당 울타리 안에서 자라게만 해 달라고 빌었는데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이 이거였나 싶으니 나는 기도도 잃었다. 무슨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매달린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어느 날은 원망이 올라왔고, 어느 날은 남의 상처는 보지 못하면서 자기 손톱 밑 작은 가시에도 우는 게 나는구나 싶어 절절하게 통감했다. 어떤 날은 온갖 모욕에 십자가를 지고 가며 결국은 매달려 죽어가는 아들을 그저 바라만 봐야 했던 성모님의 마음이 와닿아 아팠다.


그렇게 여기처럼 부표처럼 떠다니다가 자리 잡은 곳은 '이 시간이 나와 아이에게 필요한 순간이었을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 근거를 찾기 시작했다. 아이는 혈압이 낮다. 복사를 하면서 어지럼증을 호소한 게 여러 번이었는데 아이는 계속 복사를 했고, 나도 별 방법 없이 지켜보기만 했었다. 그런가 하면 이 시간을 겪으며 아이가 더 성장해서 누군가에게 더 큰 사랑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합당한 근거는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멈춰 세워야 했던 이유가 있었을 거다. 신앙공동체라고 모든 것이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님을 아이와 내가 경험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을 거다. 내가 아픈 것은 아이가 이 일로 신앙을 떠나 살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는데 그것마저도 내가 어찌할 수 없음을 이렇게 끙끙거리고서야 받아들인다. 다시 한번 모든 것을 내려놓을 것을, 내려놔야 함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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