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 복사단 회합시간에 아이가 친구와 다퉜다. 치고 박는 육탄전이 벌어졌고, 화가 난 아이가 성당 주방에 가서 식칼을 꺼내어 회합이 진행되는 곳에 들어갔다가 신부님께 제지를 받았다. 그리고 소화기를 들어 던지려고 했다. 밀려 나와 혼자가 된 아이는 커터칼을 찾아 자해를 했다. 이후 성당을 떠나지도 있지도 못한 채 배회한 듯하다. 이게 내가 듣고, 추측한 토요일의 전말이다.
고해와 미사와 보속을 마치고 나온 아이에게 담담하게 아빠랑 외식을 하고 집으로 가라고 했다. 나는 약속된 저녁 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련을 잠시나마 피하고 싶던 마음도 있었다. 흥분한 아이 앞에서는 화를 낼 수도, 울 수도 없다. 내 감정을 삭이고, 전달할 말을 정제해야 한다. 나도 시간이 필요했다.
집에 들어갔는데 집 안 분위기는 차갑다. 외식을 하며 상황을 들어주고, 지도를 하려고 했던 남편의 애씀이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들어와 아이와 이야기를 시작하자 남편은 소화를 핑계로 산책을 나섰다. 걷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데. 그 뒤로 두 시간이 지나서야 집에 들어왔으니 그도 그 나름대로 번민의 시간을 보냈으리라.
아이에게 물었다. 왜 그런 행동을 했냐고. '그냥 두면 나중에 복수를 한다.'라고 했다. 말다툼 끝에 화가 나서 한 대 때렸고, 맞은 친구가 자신의 머리를 잡고, 복부에 무릎으로 다섯 대를 때리는데 다른 아이 엄마가 자신을 내보냈다고 한다. 모든 것이 최악인 상황이었던 거다.
무엇보다도 최악인 것은 아이가 식칼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이제 더 무너질 게 있을까 했던 가슴은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아이가 누군가를 공격하다니, 공격할 의도로 위험한 무기를 들었다니 이제껏 보지 못했던 행동에 그냥 끌어안고 울고만 싶었다. 내 아이가 다른 사람을 공격하려고 했다. 칼을 들고서, 그것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친구를.
그래서는 안된다고, 누군가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물건을 들어서는 안된다고, 상대가 나를 해칠 거니까 내가 먼저 해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이르고 일렀다. 이 모든 행동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도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야 아이는 자신의 행동이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아이가 먼저 들어가 자고, 심란함을 이길 수 없는 나는 십자가 앞을 서성이며 신부님이 시키신 묵주기도를 했다.
그리고 아이 옆에 잠들었는데 아이가 오한이 와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실제 방 안의 온도는 꽤나 높아 아직 겨울 담요를 하나 더 덮고 자는 내가 이불을 걷을 정도였다. 춥다고 해 내 이불까지 덮어줬지만 아이는 덜덜 떨었고, 핫팩을 달라고 해서 전자레인지에서 핫팩을 데워 배 위에 올려줬다. 그때가 새벽 3시. 아이의 발이 차갑다.
잠시 후부터는 열이 나기 시작한다. 39도쯤 될 것 같은 체온. 오한이 와 떨었으니 열이 나는 게 당연하겠지 싶어 이불을 덮어준 체 중간중간 깨서 이마를 짚어보며 옆에서 잤다. 한 시간 정도 후 열이 떨어진 것 같다. 아이는 잠을 깊이 이루지 못하는지 새벽이 일어나 엄마, 아빠를 찾으며 거실을 두 번 왔다 갔다 했다. 나 역시도 제대로 된 잠은 자지 못한 듯하다. 아이의 상태를 보느라 몇 차례 일어나기도 했고, 잠에 들어도 차 사고가 나는 꿈 등의 연속이었다.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아이의 행동을 용서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어서 사무적인 말투가 되었다. 사고의 왜곡을 겪고 있는 아이가 안쓰러우면서도 이 상황이 또 벌어질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침 식탁에서 아이를 설득했다. 이제는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약만으로는 안된다고.
친구에게 사과 문자를 보내고, 아이는 내내 머리카락을 뜯으며 내내 후회했다. 왜 그랬을까, 자신이 왜 그렇게 했을까 하면서.
솔직히 말해서 이사하고 싶었다.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아이가 안쓰럽고 걱정되는 마음과 함께, 나의 솔직한 심정은 '창피해 죽을 것 같다.'였다. 자신의 아이조차 제대로 키우지 못한 사람이 무슨 교리교사를 한단 말인가라며 다들 비난할 것만 같았다. 다 내려놓고 산골 오지로 가서 아이를 책임지며 살고 싶었다.
이 와중에 신부님이 하신 말씀이 불편하게 가슴에 남아 있었다. 아이가 전혀 사랑받는다는 것을 못 느끼고 있다는 말, 매일 묵주기도하고, 성모님께 의탁하라는 말, 착하고 다른 친구와는 마찰이 없는데 해당 친구와는 크게 싸우니 둘 다 복사를 잠시 쉬게 하라는 말, 주일 미사는 꼬박꼬박 나오니 그것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라는 말까지. 이 말들이 듣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가 닿을지 모르시는 걸까. 버겁게 들리는 내가 이상한 걸까.
오후 시간에 신부님이 카톡을 보내셨다. 주임신부님과 몇 날 몇 시에 볼 수 있냐는 거였다. 복사단의 품위 유지나, 공동체의 기본 바탕인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것, 직간접적으로 아이들의 안전이 위협이 된 것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하시는 걸까. 아니면 아이의 상태를 알아보시고 심적으로나마 도움을 주시려는 걸까. 의도를 알 수 없어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카톡을, 의도를 가지고 읽씹은 처음이고, 그 대상이 신부님이라는 게 내가 나에게 오히려 놀랐다.
아이가 남편과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간 사이, 정신건강상담 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 그분은 묵묵히 들어주더니 아이가 조울증 1형인지 2형인지를 파악해 양육 방법을 정신건강상담센터에서 배우는 것을 추천하셨다. 부모의 의도와는 다르게 아이에게는 상처가 되는 말이 있었을 수도 있고, 그런 상황에서는 부모가 매일 사랑한다고 하는 것도 혼란스럽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명함을 보여주는 형태로 넌지시 상담을 권해보라고 했다. 무엇보다도 아이의 행동이 그저 부모의 사랑이 부족해서라고 하는 말이 맞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결국 나는 이 말이 가장 듣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애썼다고, 노력했다고. 그래서 상담사의 마지막 말에 나도 모르게 울어버렸다. 회복하기 위해, 복구하기 위해, 아이가 제대로 된 성인이 될 수 있도록 나는 아이와의 관계에 나를 갈아 넣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이 모든 일들이 더 무겁고, 견디기 힘들다. 무섭고, 허무하다.
아이에게 버티고 있음으로써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성당에서 누군가 너의 행동을 비난하든, 소문이 나서 학교에도 퍼지든 네가 한 행동을 시인하고 견뎌내야 한다고. 무지무지 힘들겠지만 엄마 아빠가 같이 하겠다고 했다. 도망가고 싶다. 가엾은 저 아이와 함께 자극이 적은 어느 곳으로든 숨어버리고 싶다. 그래도 나는 아이와 함께 여기에서 버텨야 한다. 도망치는 곳에 성장은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이 글을 쓴 오늘의 나에게 '애썼다. 수고했다." 다정히 말해 줄 수 있는 내가 되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