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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엄마 May 20. 2020

나답게 육아 #5. 체력이 국력? 체력은 육아력!

육아 스트레스 누구 탓일까?

  그릇이 깨어질 듯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부딪힌다. 물소리에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가 섞여서 단 두 사람 밖에, 한 사람은 주방에 한 사람은 방에 있는데도 온 집이 요란스럽다. 화는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화산 같다. 용암이 분출되듯 뭔가가 나와야 한다. 그래서 난 한 자리에 있지 못하고 대부분 서성이며 뭔가를 한다. 설거지는 이럴 때 참 좋은 핑곗거리다. 사나운 손놀림에, 최대로 틀어놓은 물에 시끄러워 화를 낸 티를 팍팍 내면서도 시끄러운 것이 당연하게 만들어준다. 나는 화가 나 있다.

이 날은 아이의 온라인 수업을 마치고 밖에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만나 조각 피자를 사서 소풍처럼 가까운 공원에서 먹기로 했었다. 아이는 겉옷을 벗으라고 했으나 입고서는 덥다고 짜증을 냈고, 나와 친정엄마가 짐을 차에 두러 간 사이 할아버지와 함께 있으라고 했지만 전화통화를 하는 할아버지를 두고 혼자 서점을 들어가 버렸다. 손주가 보이지 않고, 서점 입구를 모르는 친정아버지는 뜨거운 볕 아래 당황하고 서 계셨다. 책을 사러 가서는 할머니가 준 문화상품권 액수가 적어서 책을 못 사겠다고 했고, 사고 싶어 하던 마리모를 사서 돌아 나오는 길에도 감사하다는 인사조차 없었다. 꾹꾹 누르고 있던 화는 아이와 단 둘이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1차로 터졌다. 갈림길에서 차를 돌리는데 갑자기 “어!” 하고 큰 소리로 몇 차례 외쳤고 평소 짐을 많이 가지고 다니면서 잘 흘리고 다녀 뭘 또 두고 왔나 싶어 “왜?”라고 말하자 내 목소리에서 짜증을 읽은 아이가 “아니에요.” 하고 만다. 그러자 답답해서 “왜 그러냐니까?”라고 했고 아이는 마리모와 같이 들어 있는 돌고래가 예전에 거제도에 가서 샀던 고래 기념품과 똑같아서라고 대답했다. 결국 나는 잔뜩 화가 나 집에 올라가서는 아이를 정말 ‘쥐 잡듯’ 잡았다. 할아버지 할머니께 왜 그렇게 버릇없이 구느냐 라며. 목청 높여 우는 아이가 보기 싫어 방으로 들어가라고 했고, 울다가 그친 아이가 나오면 또 말하다가 화를 내고, 아이는 방으로 들어가 울다가 그치고 나오고, 그럼 또 화를 내어 아이는 울고 방으로 들어가고. 미친 짓의 사이클이었다.


  처음에는 차분하게 시작했다. 엄마는 분명히 할아버지랑 같이 이동을 하라고 했고, 할아버지가 통화 중이시라고 혼자 가버리는 건 잘못했다, 그것에 대해서 엄마가 너에게 소리를 친 것도 아니고 ‘네가 없어져서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걱정하셨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는 뭐라고 했니. 내가 햇볕에 타 죽는 것보단 낫잖아요.라는 말이 그 상황에 맞니, 책은 사고 싶었던 책이 없었던 것도 이유인데 왜 할머니께 돈이 부족하다고 말을 했니, 할머니가 너에게 주는 것이 당연하니, 감사하다는 인사는 왜 하지 않는 거야. 등등. 그런데 말을 하다 보니 자꾸만 화가 났다. 묵묵부답으로 대답하지 않는 아이가 답답하고 답답하니까 더 짜증이 나면서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미 가득 화가 나니까 멈춰지지가 않았다. 분명 어느 책에서는 뇌에서 화와 관련된 격앙된 감정이 나오는 건 90초라고 들었는데 난 90초가 아니라 90분쯤 되는 것 같았다. 끝없이 감정은 들끓었고, 우리가 대화해서 푸는 마지막 기회라고 꼭 필요한 거 가방에 넣어 현관 앞에 두고 또 소리 지르고 울면 방이 아닌 그대로 현관으로 가서 짐을 들고나가라고 소리쳤다.


  이게 아닌데. 화가 난 이유를 말하고 화를 내고 있는데도 전혀 화가 가라앉지 않고 더 커지는 것 같은 이유는 뭐지? 내 입으로 말하는 아이의 잘못된 행동들이 왜 입에 붙지 않고 겉도는 거 같은 걸까? 자꾸만 주절주절 말하다 보니 다른 것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친정부모님을 만나러 갈 때에도 나는 부모님 드리려고 새로 만든 반찬 한 가지, 간식 한 가지, 수박 자른 것 등을 넣은 아이스박스 등의 짐을 혼자 들고 내려갔다. 돌아올 때에도 드릴 것들 외 남은 짐들을 정리해 올라오는 것은 내 몫이었다. 주차 후에는 이미 트렁크의 짐까지 챙겨 들고서 올라갈 준비를 마친 나와는 달리 아이는 아직도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있었다. 공동의 짐을, 좀 컸으면서 나 혼자 들게 하다니 못된 녀석. 이렇게 생각하자 또 다른 것이 툭 튀어나왔다. 나는 애가 할아버지를 버려두는 잘못(?)을 했지만 막무가내로 소리 지르며 화낸 것도 아닌데. 또 다른 것도 나왔다. 피자. 난 먹고 싶었던 피자도 자기가 다 먹겠다고 해서 양보했었는데 결국 집적거리다 안 먹겠다고 해서 식은 남긴 피자를 먹었지. 그래 놓고선 피자에 고기가 맛없어서 못 먹겠다고? 첫 번째 조각은 개 눈 감추듯 감춰놓고선. 어쩜 말을 저렇게 하지? 드디어 나왔다. 내가 미친 듯이 화를 낸 이유. 화를 냈지만 화가 계속 남아있던 이유. “내가 너의 시녀야? 내가 하녀니? 엄마니?” 이거였다.


  사랑하는 방법이 꼭 사랑하는 대상을 나보다 더 높은 곳에 두고, 나보다 더 앞세워야만 하는 건 아닌데 아이를 낳은 후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더 좋은 건 아이 주고, 나는 허름한 것을 택했다. 아이는 한우를 먹고, 나는 호주산을 먹었다. 부부는 일심동체니까 아이에게는 노**** 패딩을 사주면서 남편은 스**에서 고르라고 했다. 최근에는 밥 먹은 후 그릇을 싱크대에 가져다 둔다거나, 장 본 것을 들고 올 때면 도와달라고 하기도 하지만 아이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지, 할 때도 있지만 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억울하기도 하다. 안 시켜서 못한다고 하기엔 나이 때마다 적절한 과업이라고 생각되는 정도는 주문했는데 여전히 저런 걸 어쩌란 말이냐 싶기도 하고, 배려를 받아 본 아이가 배려를 잘한다고 했는데 왜 이런가 싶기도 하고.


 그런데 문제는 나였다. 그것도 언제나처럼.

친정부모님과 만난다고 생각하면 이상하게 긴장이 된다. 편한데 편하지 않은 이 기분. 괜찮긴 한데 다 괜찮지가 않아서 그런가 보다. 집을 떠나기 전 나는 항상 마음속으로 말한다. ‘나랑 다른 분들이다.’라고. 그리고 이건 나만의 문제는 아닐 거다. 그래서 ‘나의 다정하고 무례한 엄마’라는 신간도 나왔을 테지. 어쨌든 이미 긴장하고 간 상태, 바람처럼 빠른 엄마는 이미 뭘 하시든 후다닥후다닥 하신다. 소풍처럼 바람도 느끼고, 하늘도 보고 뭔가 천천히 하고 싶었는데 먹는 것도 빨리, 어서 먹어야 한다. 따뜻할 때 먹이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이러니까 나에겐 나들이가 과업 같다. 남들이 보면 사지육신 멀쩡한 나지만 별 거 아닌 거에도 온몸의 뼈마디가 쑤신다. 차에서 가지고 내릴 짐을 정리해 차를 타느냐, 나중에 내려서 짐을 정리하느냐로 설왕설래하는 부모님, 그리고 주차장 입구를 의도치 않게 막고 있는 내 차와 이동을 바라는 경비아저씨의 눈빛도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이 와중에 아들은 “물 주세요.”라고 말하고. 내가 화를 낸 단편적인 장면만 보면 난 아이에게 예의를 가르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엄한 엄마 정도로 포장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엄연한 현실은 내가 긴장하고, 내가 피곤했던 거다. 부모님과의 만남이라는 긴장감, 그 사이에서 아이에게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전달하되,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서 일명 진상을 떨지 않도록 잘 이야기하는 것, 따끈하고 맛있는 피자 먹으며 바람 쐬자고 했는데 내가 먹은 건 아이가 맛있는 부분만 쏙 잘라먹고 남은 식은 피자였다는 것. 진실은 이거다.


  사실은...... 아이는 가르칠 수 있는 거였다. 좋게 타이르는 내게 불손한 말을 내뱉어도, 할머니께 돈이 작다는 억지를 부려도, 감사하다고 하지 않아도 그러면 안된다고 가르치면 되는 거였다. “오늘 네가 원하는 책을 찾지 못해 아쉽구나.” 라거나 “감사하다고 말하면 더 좋겠다.”라고 가볍게 집고 넘어가도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나의 피곤함, 내 마음의 긴장감, 나의 아쉬웠던 식사를 아이의 예절을 핑계 삼아 쏘아붙였다. 세상에나. 이렇게나 비겁할 수가 없다.


잘못된 분노는 대번에 문제를 만든다. 엄마에게 온갖 악평을 들은 아이가 의기소침해 있으면 그건 또 그거대로 내 탓이 된다. 왜 그랬을꼬. 미쳤지 미쳤어하는 생각과 함께 또 하나의 사과거리가 된다. “미안해. 엄마가 아까는 마음이 편하지 않고, 먹고 싶은 걸 먹지 못해서 너한테 정도 이상으로 화를 냈어. 엄마가 잘못했어.” 사과는 나쁘지 않지만 잦은 사과가 아이에게 얼마나 전달이 될지 염려가 되어 불안해하는 건 그 뒤의 일이다.

이런 날이면 나의 모든 것이 아쉬워진다. 높은 긴장도, 깐깐한 기준, 살인무기인 혀까지. 모든 게 아쉽고 싫다. 그중에 제일은 단연코 체력이다. 조금만 더 견딜 육체적 힘이 남아 있었다면 하는 생각에 비타민 병을 연다. 손이 덜덜 떨려 약이 바닥으로 다 쏟아진다. 이런 제길. 누가 체력은 국력이라고 했나. 엄마에게 체력은 육아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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