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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엄마 May 24. 2020

나답게 육아 #6. 친애하는 나의 전우.

이런 이름으로 그대를 부를 줄이야. 

  아이가 아팠다.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데 아이가 화장실을 가더니 비명을 지르는 것이었다. 고관절 쪽이 아파서 일어나질 못하겠다고 해서 부축을 해서 데리고 나왔다. 별다른 일이 없었는데도 아이가 아파하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종종 그 부분이 아프다고 해왔는데 성장통이라고 가볍게 여긴 것은 아닌지 염려도 되었다. 누워 있다가 남편이 퇴근해 들어오자 절뚝거리며 일어나 인사를 하는 아들을 보며 남편은 처음엔 장난치다가 어디 부딪힌 정도로 예사롭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아이가 잘 설명을 못하는 것 같아서 ‘화장실을 갔는데 고관절 쪽이 아프다고 혼자 일어나질 못하더라. 그래서 부축해서 데리고 나왔고, 누워 있으라고 했다.’라고 상황 전달을 하자 남편이 아이를 살피며 함께 걱정을 하였다. 

 저녁 7시가 넘은 시간이었고, 지금 당장 진통이 극심하게 오는 건 아니니 내일 오전 병원을 데리고 가보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남편이 “오늘은 많이 아프면 아빠가 안고 씻을까?”라고 아이의 의사를 물었다. “무슨 말이야?” 물어보니 예전에 너무 씻기 싫어하며, 다리 아프다고 할 때 둘이서 샤워하러 들어가서는 아들을 안아서 씻겼다고 한다. “세상에. 그런 일이 있었어?


 나는 아이랑 같이 샤워를 하지 않는다. 전혀 하지 않는 건 아닌데 일 년에 손꼽을 만큼 드문 일이다. 우리 집에서 샤워는 아빠의 영역이다. 어릴 때부터 물놀이가 아닌 목욕은, 특히 머리 감는 것은 자지러지게 울었던 아들이 덜 울게 되고, 혼자 서 있을 수 있게 되면서 대부분의 날을 아빠와 샤워를 했다. 육아와 관련된 부모의 여러 가지 일과는 부부간에 각각 나뉘어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 하루 종일 아이와 집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씻겨야 하는 저녁 즈음엔 몸이 방전이 된 듯했다. 아이가 많이 어릴 땐 심하게 울어서 겁이나 혼자 씻길 수 없었다. 그 뒤 조금 컸어도 어릴 땐 아토피가 심해서 빠르게 씻겨 내보내 온몸에 크림을 발라주어야 해서 한 사람은 안에서 씻기고, 한 사람은 밖에서 보습크림을 발라주다 보니 아이 목욕에 두 사람이 필요한 것이 당연했다. 이후 아이의 상태가 좀 괜찮아져서 남편이 같이 샤워를 마치고 나와도 되는 시점이 되자 자연스럽게 목욕 업무에서는 나는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 두 사람만의 과거(?)는 몰랐다. 

 내가 모르는 그들만의 에피소드가 있다는 것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들뜨는 경험이었다. 우리 집에서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은 대부분 엄마인 나였다. 아이의 예쁜 짓도, 미운 짓도 내가 다 보거나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남편도 남편 나름대로 아이를 보고 웃고, 아이를 견디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남편이 육아라는 전쟁터의 <전우>로 보였다. 그리고 가족을 이루어 가고 있다는 동질감도 느낄 수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좋던 연애시절을 거쳐 부부가 되었다. 좋은 시절도 있었을 텐데 아프고 나쁘고, 슬펐던 기억이 더 오래 남아 있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의 나는 농담처럼 “나를 만나기 전 남편이 만나던 그녀와의 결혼을 반대했던, 그녀의 아버지가 원망스럽다.”라고 말하곤 했었다. 편들어줌이 더 기분 나쁜 이런 류의 말은 수능을 망쳐 이과인데 문과로 교차 지원했다는 남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더 안타까워하는 업그레이드된 버전도 있다. 이런 말이 나왔던 건 내 나름의 속상함도 있었다. 결혼 전의 연인과 결혼 후의 남편이 동일 인물이 맞나 싶게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서글서글하고 모나지 않은 성격, 유머러스한 표현이 참 좋았던 그 사람은 결혼 후 싫은 건 싫다, 좋은 건 좋다 단호하게 말하지 못하는 성격으로 보였고, 세심하지 못한 말투가 계속 거슬렸다. 아이와 생활하면서 이런 단점은 더 크게만 보였다. 너도 나도 익숙지 않은 “육아는 처음이라” 긴장도는 높은 상태에서 갈팡질팡 우왕좌왕하면서 내가 스스로 기대한 것보다 잘 해내지 못하는, 그래서 엄마 역할의 공백이 느껴질 때마다 남편이 자기 몫을 못해주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졌다. 남편은 신생아인 아들의 손톱을 처음으로 깎아야 하던 순간, “나 한 번도 안 해봤단 말이야.”라며 나에게 미뤄서 “아니 그럼 나는 어디서 해봤어?”라는 말을 들었다. 아이가 새벽에 통잠을 못 자고 깨서 칭얼거릴 때에도 아이가 우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해서 울음소리를 듣고 일어나서 어르고 달래던 내가 괜히 억울해지곤 했다. 

 남편도 나도 육아는 처음이었지만 준비가 되었건 되지 않았건 낮 동안은 혼자 아이를 봐야 했던 나는 인턴생활 없이 실전에 내던져진 직장인이었다. 미숙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더 해 보는 만큼 더 빨리 익숙해져 갔다. 반면에 남편은 직장체험에 이어 인턴을 마친, 그리고 정식으로 부서에 발령 났는데 사수도 있는 케이스였다. 내가 결코 다정하고 친절한 사수는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아이가 울거나 칭얼거릴 때면 “잠 올 시간이야.”, “먹기 싫은가 보다.”, “응가가 잘 안 돼서 기분이 안 좋은가 보네.”등을 알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없는 것보다는 한결 안심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대로 순탄하게 흘러갔다면 남편은 육아에 있어서는 나에게 더 많이 의존했겠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에겐 산후 우울감이 있었다. 내 짐작에는 이것이 일련의 사건과 더해져 산후우울증으로 발전했었던 것 같다. 울거나 화를 내거나 작은 일로 분노하는 감정 기복 외에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나를 쳐다보는 것 같다던지, 자동차 번호판의 숫자에 심각하게 집착하는 등의 강박증도 경험했다. 정신없이 미쳐가는 나를 고삐 세워 멈춘 것은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신앙이었고, 또 하나는 나만의 시간이었다. 물론 그때는 갑작스러운 외벌이와 시댁에 갚아야 했던 주택 관련 자금이 부담이 되어 나에게 커피 한 잔도 아쉬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다고 해도 뭔가 엄청 근사하게 보낸 건 아니었다. 강변을 걷고, 오래도록 걸어가서 무료 자전거 대여소에서 자전거를 타고, 큰 맘먹고 강 변 카페에 들어가 음료와 케이크를 사 먹던 시간. 그리고 친구들을 만날 때에도 10번 중 9번은 아이는 남편에게 맡기고 혼자 나가는 식으로 내 시간을 만들었다. 너무 힘들 때에는 새벽 미사를 다녀왔는데 세례를 받기 전이라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냥 미사가 진행되는 것을 뒷자리에 앉아 보곤 했다.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말씀 중에 어쩌다 가슴에 남은 것이 하나 둘 쌓여서 조금 더 견딜 힘을 주곤 했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서 문을 닫는 그 순간 이유 없는, 하지만 선명한 공포가 올라와 발걸음을 떼지 못한 순간도 있었지만 그래도 괜찮을 거라고, 괜찮을 거라고 애써 나를 다독이며 목적지를 향했던 날도 있었다. 

 이렇게 다닐 수 있었던 건 남편 덕분이었다. 주말이면 집을 나서거나, 어느 날 새벽, “나 성당 좀 다녀올게.”하고 한 시간 뒤 돌아오는 나를 전혀 제재하지 않았던 남편이었다. 내가 힘들다는 걸 자기도 알아서일 수도 있고, 결혼 전에는 ‘모나지 않은’으로 보였다가 결혼 후에는 ‘단호하지 않은’으로 보인 성격 탓인지도 모른다. 1년여의 짧은, 그래서 더 달콤했던 연애시절을 거치고, 아이를 낳고 기르며 눈만 마주쳐도 으르렁거렸던 원수의 시간이 더 길었지만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삶 안에서 나는 나의 역할을 그는 그의 역할을 각자 빠르거나 느린 템포로 익혀나갔다. 


  생각보다 꽤나 우리가 잘 살아왔다는 것을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내가 더 좋은 엄마이길, 그리고 남편이 더 좋은 아빠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앞서서 못한 것들이 더 크게 보였다. 그래서 내가 (내용물은 무엇이 되었든) 하루 세 끼를 아이와 먹고, 시간을 내서 아이가 좋아하는 산책을 하려고 한다거나, 보드게임을 한다거나, 약속을 하고 지켜나가는 소중한 일상을 가볍게 여겼다. 그만큼 남편이 잘하고 있는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지금도 남편은 주말이면 아이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만들어주려고 노력하고, 피곤해서 일요일 낮잠을 자고 싶을 때에도 아이와 30분이라도 공을 던지고 받으며 논다. 토요일에 방과 후 프로그램으로 아이가 바둑과 야구를 할 때면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는 것도 당연하게 했다. 평일엔 야근이나 회식이 없으면 무조건 아이 목욕은 아빠와 함께이다. 평일에는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으니까 주말만큼은 온전히 아이와 함께 보내려 노력한다. 그래서 아이는 아주 어릴 4살, 5살 경에도 엄마가 주말에 “엄마 공부하고 올게.” 하면 아쉬워하며 안아줄 뿐 못 가게 하거나 따라 나오거나 매달려 우는 건 일절 없었다. 주말은 아빠와 실컷 논다는 생각이 이미 튼튼하게 뿌리내리고 있었으니까. 


 <그들만의 이야기>가 나에게만 감추는 비밀이라는 말은 아니다. 뭔가를 애써 숨기려 든다면 분명히 나는 서운할 거다. 그러나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굳이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일과 속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역할이 자연스러웠고, 자주 되풀이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초등 저학년이라고 해도 이제 안고 씻기기는 힘들 아이를 안아서 씻겼던 남편의 일화가 반갑다. 육아에 있어서 내가 정식 사원일 때 직장 체험하는 대학생 같던 남편이, 내가 대리쯤 되었을 때 일개 인턴 같던 남편이 이제는 진정한 전우가 되었다고 생각되던 그 날의 저녁. 반갑다. 나의 전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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