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관심을 "라떼"라고 표현합니다.

Hello, Santiago

by Hei 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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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자다 눈을 떠보니 새벽 3시다. 처음 자보는 알베르게, 2층 침대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 일어났는데 도무지 다시 2층 침대로 올라갈 용기가 나지 않아 그냥 기상하기로 했다.

론세스바예스 공립 알베르게는 특정 시간이 지나면 문을 잠가 나갈 수는 있지만 들어오지 못한다. 바람이라도 쐬려고 나가려면 다시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에 각오를 해야 한다. 날씨도 너무 추웠던 터라 나는 1층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쉬기로 했다. 프랑스 길을 걷는 순례자들이 피레네에서 숙박하지 않는다면 생장을 떠나 처음으로 맞이하게 되는 곳이 이곳이라 그런지 이른 새벽임에도 출발을 준비하거나 나처럼 1층에서 쉬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보인다.


일부 한국인 순례자들은 동이 트려면 한참 남은 새벽 4시 반, 벌써 다음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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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턴을 챙겨갔지만 밤에 혼자 걷기는 무서워 아침 7시가 되어서야 출발했다. 드디어 말로만 듣던 거리 표지석이 나오고 들뜬 마음에 아직은 어두컴컴한 숲길을 씩씩하게 걸어간다. 20여분 정도 걸으니 이제 슬슬 해가 뜨며 하늘이 핑크빛으로 물드는 것이 황홀했다. 어느 정도 걷다 보니 슬슬 배가 고파져서 조식을 신청하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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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후기를 통해 미리 봤던 벽화를 감상하며, 다음 마을에서는 꼭 아침을 먹고 가야지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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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마을을 지나 돌다리를 건너니 산길에 접어들었다. 도중에 길을 잘못 들었지만 친절한 순례자들이 잡아주어 정확한 길을 찾아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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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문을 연 카페가 보여 들어갔다. 마침 내가 좋아하는 과카몰리가 잔뜩 올라간 빵이 보여서 바로 주문하고 선선한 아침 바람을 만끽하러 야외테이블에 앉았다. 조금 쉬다 보니 어제 피레네를 넘으며 만났던 고기아저씨와 친구들이 다가온다.(*그가 고기아저씨가 된 사연은 아래에 나온다) 한참 어려 보이는 나에게도, 다른 누구에게도 꼭 존대하시며 젠틀하신 분들이었다. 함께 아침을 먹고 너무 오래 쉬면 걷기 힘들다는 당부와 함께 세 아저씨가 먼저 출발하고 슬슬 흐려져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나도 다시 목적지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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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레네를 벗어나 처음으로 걷는 길은 생각보다 마을이 많지 않았다. 목적지의 반쯤 왔을 땐 어딘가 아프고 힘이 들어서 멈추고 싶다기보단 그냥 걷기 싫어지기 시작했다. 마을이 많지 않으니 쉴 곳도 여의치 않다. 아직 초반이라 그런지 길바닥에 주저앉아 쉬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저 이렇게 말이나 새로운 풍경이 나타났을 때 사진을 핑계로 멈춰서 숨을 고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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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목적지인 수비리에 도착했다. 다리 바로 앞에 보이는 집이 오늘 내가 머물 알베르게이다. 한국에서도 접근성 좋고 시설 깨끗하기로 유명한 알베르게라 미리 예약을 하고 방문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모든 베드가 한국인으로 풀부킹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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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할 나위 없이 깔끔한 숙소에 만족하고 좀 쉬다 보니 다리를 건너 이 마을에 도착한 순례자들이 보인다. 오늘도 해인이와 같은 숙소에 묵게 되어 언제 도착할지 한참을 기다렸다. 주방에 서서 기웃기웃하다 보니 다른 방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제도, 아침에도 만났던 고기아저씨였다. 함께 다니던 세분이 워낙 친해 보여 원래 친구인 줄 알았는데 생장에서 처음 만난 사이라고 한다. 오늘은 숙소에 한국사람들끼리 모인 기념으로 고기를 구워 먹자고 제안하셨다.(그래서 고기 아저씨가 되었다) 고기아저씨의 큰 배낭 안에는 쌈장을 비롯한 각종 한식과 라면이 있어 통 크게 아저씨가 한턱 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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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있을 고기파티를 기대하며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고 더위에 지친 강아지와 가볍게 물놀이도 즐겼다.

내일의 여정은 걱정도 되지 않는지 더운 뙤약볕과 추운 그늘을 돌아다니며 마을을 탐색했다. 작은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 쉬고 있었는데 만나는 한국 분들마다 오늘 고기파티에 대해 묻는다. 고기아저씨와 함께 다니던 한 아저씨가 오늘의 주최자를 묻더니 고기아저씨에게 자신의 연락처를 전해달라고 하셨다. 그날 저녁 나는 고기아저씨에게 연락처를 전달해 드렸지만 오다가다 마주치면 만나게 되는 것이 인연이라며 끝내 연락처를 저장하지는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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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마을이 작은 한국이 되었다. 한국사람들로 가득했던 이 마을에서 오늘의 고기파티가 참 유명해졌다. 이때 알게 된 소식인데 오늘은 일요일이라 정육점에서 고기를 살 수 없어 어느새 참여자가 수십 명이 되었던 고기파티는 그렇게 시작도 못하고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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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이와 빠에야를 주문해 간단히 저녁을 먹었다. 일요일이라 문 연 식당과 마트가 없던 작은 마을이라 이 작은 식당에 사람들이 가득히 모였다.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들린다. 이제 순례길의 시작이라 그런지 순례에 적응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몸이 아프다고 했다. 아직도 내게 귀여운 양갈래머리로 기억 남는 정은이는 온 다리에 상처와 발에는 벌써 물집으로 그득했고 몸을 가누기도 힘들 정도의 바람과 함께 피레네를 넘은 사람들은 감기에 걸렸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내 입술엔 대상포진이 올라와있고 코는 훌쩍이고 있다.


한시라도 빠르게 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숙소로 돌아왔다. 다들 이른 저녁임에도 침낭을 정리하며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한다. 고기아저씨는 고기파티를 하지 못한 게 아쉬운지 내일 우리가 들르게 될 마을과 정육점의 위치를 알아보고 계셨다. 침대에 눕는 순간에도 "아고고" 하는 곡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그러자 한참을 고기 얘기를 하시던 고기 아저씨가 양손에 봉투를 잔뜩 들고 나서기 시작했다.


나는 등산을 많이 해서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하시며 한국에서 챙겨 온 약들을 증상에 따라 하나씩 나눠주시기 시작했다. 훌쩍이는 나에게도 콜대원 하나가 배정되었다.

한국에서 약 챙겨 왔냐는 질문에 평소 쥐가 잘 나서 근이완제와 소화제만 챙겨 왔다고 하니 혀를 끌끌 찬다.


외국에서 산 약은 잘 듣지도 않아, 한국 사람이 한국 약을 챙겨야지.
나 때는 이런 거 다 챙기지도 못했는데
요즘은 세상이 얼마나 좋은지 약도 소분해서 가져가기 편하고 @#$%


늘 누구에게나 존대하시던 젠틀한 고기아저씨가 어느새 잔소리 폭격기가 되었다. 라떼를 외치며 준비성이 철저하지 못했던 나에게 빠른 속도로 잔소리를 하신다. 손에 들고 있던 콜대원은 마셔야 할지 내려놓고 이야기를 먼저 들어야 할지 우왕좌왕했다. 얼른 마셔요! 고기아저씨의 사인이 끝나자마자 콜대원을 원샷했다.


고기아저씨는 이후에도 3일간 계속해서 마주치며 인연이 이어졌다. 고기아저씨는 함께 다니던 친구의 연락처를 저장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 누구의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연락처도 궁금해하지 않으셨다. 다만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가 아프거나, 다치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가 라떼를 외친다. 고기아저씨가 말하는 라떼는 "아프면 걱정된다", "다치지 말아라", "조심해라"라는 의미가 틀림없었다.


IMG_5716.HEIC 힘들어도 즐기는 12월 15일의 현규 님처럼, 힘들어도 베풀고 즐기는 고기아저씨처럼 내 여정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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