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o, Santiago
4월 5일 오전 7시. 아직 해가 다 뜨지 않은 새벽
알베르게에서의 짧은 하룻밤을 뒤로하고 드디어 본격적인 산티아고 순례길이 시작된다.
과일, 빵, 오믈렛, 치즈 그리고 따듯한 커피까지 조식을 챙겨 먹고 알베르게 로비에 삼삼오오 모여 안전한 순례길을 위해 다 함께 기도한다. 물론 모두가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앞으로의 어려운 여정을 모두 함께 앞두고 있기에 기쁜 마음으로 기도에 참여했다.
오늘은 기대하던 피레네 산맥을 넘는 날.
어제 함께 저녁을 먹은 성우오빠는 피레네 산맥에 위치한 알베르게에서 1박을 하며 피레네를 온전히 즐길 예정이라 충분히 휴식하고 느지막이 출발한다고 한다. 10여 km를 더 가야 하는 나와 해인이는 아침 일찍 걷기 시작했다.
피레네 산맥이 시작되는 산길까지 걸어가는 동안 벌써 날이 밝았다. 인터넷으로만 보던 노란 화살표를 실제로 보게 되니 슬슬 내가 이제 순례길에 올랐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모든 것이 신기했기에 열심히 사진을 찍고 남겼다. 평소 한국에서도 등산을 즐겨하기에 앞으로의 길 정도는 충분히 걸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 8.2km의 배낭도 둘러어고 자신 있게 길을 시작했다.
걸을수록 한국 산과는 다른 풍경이 계속해서 펼쳐진다. 소, 말, 양이 보인다. 어떤 동물들은 울타리를 벗어나 사람들이 걷는 길에 서 있기도 했다. 세상 이보다 더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걷고 또 걸어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4월 초의 산티아고 순례길은 한국 사람으로 북적인다. 부모님 나이대의 어르신들도 많고, 나보다 어린 친구들도 많다. 사람을 피해 떠나온 길이지만 한 명 한 명 알아가는 즐거움이 있었다. 오늘은 등산화에 무릎 모호대까지 중무장을 한 사람들 사이로 기능성도 아닌 면 레깅스를 입고 바람막이 대신 후드 집업을 어깨에 둘러맨 A를 만났다. A는 숙소도 예약하지 않고, 이 길이 어떻게 진행될지도 모른 채 무작정 순례길을 시작했다고 한다. 생장에서도 알베르게가 풀 부킹이라 피레네 산맥의 시작점까지 걸어와 숙박을 했다고 한다. 계획형 인간으로 살아온 나는 앞으로의 모든 일정에 대해 숙소 리스트를 정리해 왔다. 혹시나 어딘가 다치거나 아파서 일정을 소화하지 못할 것에 대비하여 처음 5일간의 숙소만을 예약했고, 이후 숙소는 며칠 전에 예약해야 하는지 어떤 링크로 혹은 어떤 전화번호로 예약해야 하는지 플랜을 엑셀 가득 정리해 왔다. 그런 나에게 A의 용기는 너무나도 대단했다.
순례길의 누구나 그렇듯 스몰토크 후에 헤어진 A를 다시 만났다. 이곳은 조금 지칠 때쯤 나온다는 오리손 산장으로, 목적지까지 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는 화장실과 바르였다. 여기서 화장실과 점심식사를 해결해야 한다.
나는 딱딱한 바게트로 만들어진 샌드위치, 해인이는 또르띠야를 주문하고 잠시 점심 식사를 하며 휴식을 취했다. 바게트빵이 너무 딱딱하고 내 입맛엔 맞지 않아 반도 채 먹지 않고 남겼다.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야외에서 식사를 하던 A는 어느새 맥주를 병째 들고 마시고 있다.
오늘의 피레네 산맥은 너무나 아름다웠지만 불어오는 바람으로 한발 한발 걸어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Are you OK? 하고 물어오는 외국 친구들에게 Maybe.. I'll fly away라고 답하자 재밌다는 듯 까르르 웃는다. 멀리 걸어가던 A는 정말 하늘을 날아가는 것처럼 양팔을 벌리고 바람을 만끽하고 있다. 그냥 걷기에도 바람에 밀려 힘든데 양팔을 벌리고 만끽하는 A가 새삼 대단해 보였다.
함께 걷진 못했지만 계속해서 마주치던 A와 잠시 앉아 전 날 0.99유로에 구매한 방울토마토를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역시 당분을 섭취하니 조금 걸을만해졌다. 쉬는 김에 A에게 걱정되지 않냐고 물어보니 A가 자신 있게 말했다.
여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인데, 그냥 하는 거죠 뭐
나는 숨이 턱까지 차올라 죽을 것 같은데 저 여유로운 A의 한 마디가 그저 부러웠다.
얼마나 올랐을까, 이제 정말 끝이 나오려나 숨을 헐떡이다 보니 십자가가 보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누군가의 무덤이었을 것 같은데 이런 순례길의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던 나는 잠시 기도를 핑계 삼아 쉬어가기로 한다.
벌써 저 멀리 올라가는 A가 보인다. 오늘 A와의 만남은 여기서 끝이겠거니 생각했다.
한참을 걸어 올라 보이는 식수대에서 부족한 물통을 채웠다. 걷지 못하겠다 보다는 걷고 싶지 않다가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일을 할 때 내가 가장 많이 하던 말은 "누군가 해낸 일이라면 나도 할 수 있어"였다.
그러니 후배들에게 업무를 지시할 때도 "내가 하던 일이니 너도 할 수 있어"라며 지시하고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후배를 보며 "나도 했는데 너는 왜 못할까"를 생각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른 첫날부터 깨달음이라도 얻었는지 저 멀리 멀어지는 A를 보던 나는 ,
누군가 해냈다고 해서 누구나 쉬운 건 아니구나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쉽지 않으면, 힘들면 어쩌겠나 이제 와서 돌아갈 수도 없는걸.
이제 힘듦의 한계를 넘어 A가 되어 보기로 했다. 무념무상. 그냥 끝까지 가는 걸로..!
드디어 길고 긴 산길이 끝나고 오늘의 목적지인 론세스바예스 국립 알베르게가 보인다.
시간은 저녁 6시, 무려 11시간이나 걸렸다. 이런저런 핑계로 쉬다 보니 남들보다 훨씬 늦게 도착했다.
도착했다는 성취감보단 드디어 화장실에 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 긴 숨을 내쉰다.
그리고 오늘의 하루는 이렇게 정리한다.
내일도 그냥 가 보자, 무념무상의 A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