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히드로공항의 입국심사원
May 5. 2015 (London Heathrow Airport)
" What is your purpose? "
" I'm here for tour."
" Are you traveling alone? "
" Yes. I'm alone."
" What is your next destination? "
" Paris. "
" Okay. um.. "
" I have booked a EuroStar ticket. here it.... (Rustling) "
" No~ That's Okay. I BELIEVE YOU. "
" .... "
" You can go now. Good luck. "
" Thank You. "
영국행 비행기 안, 두어시간쯤 자고 일어난 나는 소책자를 펴고 영어회화 표현들을 읽으며 '이 정도는 괜찮겠네'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승무원에게 질문을 하려고 보니 머리속이 하얗게 되는게 아닌가. 초중고에 대학교까지 적어도 16년은 영어를 안 배운 적이 없거늘, 나는 그동안 무엇을 했단 말인가. 하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학창시절에 소유한 지식은 휘발성이 매우 클 것이다. 주요과목을 제외하고는 시험 전 날 달달달 외운 지식을 시험지에 까맣게 불태우고 나면 대부분 다 소진되지 않았던가. '그냥 솔직히 너의 머리가 나쁜....'하는 깊은 곳 양심의 소리는 무시한 채, 결과만 중시하는 한국형 주입식 교육의 큰 폐해로 인한 피해자라고 나 스스로를 위로하며 비행기에서 내내 소책자와 함께했다.
경비를 줄이기 위해 선택한 저가항공이 마침 홍콩을 경유하기에, 다소 빠듯하지만 유명한 홍콩의 야경을 보러 갔다. 버스와 페리를 타고 도착한 시내에서 한참을 헤메고 걸어다녔다. 시간에 쫒기듯 본 야경은 안개로 가려져 희미했고, 고온다습한 날씨로 불쾌지수가 높아서인지 무례한 사람들도 많았다. 우여곡절 끝에 공항에 돌아와 환승할 비행기를 기다리며,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 잠시 들리는 곳에서 벌써 지쳐버린 나를 발견했다.
살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나'는 보이지 않고, 오로지 불특정 다수의 누군가를 위한 소모품으로만 전락한 것 같았다. 일에서도 가정에서도 관계에서도 나는 모두 잘해야만 했으며, 항상 염려했고 조급했고 바빴다. 순전히 나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여행을 떠나기로 다짐한 뒤에 내가 가장 먼저 계획한 것은 '반드시, 혼자 떠날 것' 이였다. 혼자서라면 염려하거나 조급해하거나 바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책에서 '마음을 빗질하러 종종 여행을 떠난다'는 작가의 표현을 빌어, 언제부턴가 마구잡이로 엉켜버린 내 마음이야말로 정말 빗질이 필요했다.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 차다 못해 종종 입밖으로 흘러 넘치기도 했고, 단 얼마간이라도 어떠한 역할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그냥 '나'이길 바랐다. 그렇게 곱게 빗질하러 떠난 여행길, 그 길에서도 여전히 '나'는 잘해야만 한다는 욕심으로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다.
아무도 없이, 아는이 없이, 오롯이 홀로 서보기를 바라고 바랐던 그 꿈 속의 현실을 드디어 마주했는데 행복하지 않았다. 다양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비행기에서 쏟아져나오고, 입국장으로 향하는 인파를 따르며 나는 그야말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입국심사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뒷목이 찌릿 소름이 일었고, '나 혼자서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하며 덜컥 겁이 났다. 문득 실감이 난 것이다. 타국 땅, 수많은 타인들, 멍하고 불안한 '나' 자신조차도 모두 낯설었다. 태어나서 '낯설다'라는 말을 이렇게 온몸으로 체감한 적이 있었던가. 건장한(무서운) 흑인 입국심사원 앞, 애써 태연한 척 여권을 내밀고는 질문에 대답했다. 히드로 공항의 입국심사가 까다롭다고 익히 들은터라, 지레 겁먹고 인쇄해간 유로스타 예약권을 부스럭대며 내밀었다. 나도 모르게 덜덜덜 떨면서 예약권을 들고 있는 내 손에 심사원의 눈길이 잠깐 머물렀다. 심사원은 괜찮다고 예약권을 보지도 않고 돌려주며, 미소지은 얼굴로 덧붙였다. (어릴 적 아빠가 내게 지었을 법한 인자하고 따뜻한 느낌의 미소..)
" I Believe You. "
그 한마디가 나의 모든 여정을 바꿔놓았다. 그저 흔한 말이지만, 그 순간 나에게는 정말이지 완벽한 말이었다. 물론 듬직한(수식어는 바뀌기 마련이다) 그 심사원이 어떤 의도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나는 아마도 그가 그냥 나를 도와주려고 했다고 생각한다. 그저 그와 내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에서 무한한 동질감과 애정(?)을 느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누군가는 그렇게 특별한 일이 아니라 여길 수도 있지만, 나의 여정에는 너무나 특별한 순간이었다. 나의 욕심이나 불안감, 낯설음을 직면할 용기가 생겼고, 든든한 '나'를 믿고 나의 여정을 지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무래도 여행(자의로 떠난 여행은 더욱)은 시야가 넓어진다. 인간은 대게 편한 익숙함을 좋아하고, 익숙함에서는 근시안적인 사고로도 일상이 충분한 경우가 많다. 반면 불편함과 낯설음은 되도록 마주하기 싫은 존재인데, 때로 인간에게는 그런 불편함과 낯설음이 오히려 필요하기도 하다. 특히 '여행'의 경우가 그렇다. 불편하고 낯설음이 가득한 '여행'에서 우리는 원시안적인 시각이 뚜렷해지고, 잊고 있던 무언가에 대한 본질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주로 사람을 나를 지치게 하거나 힘들게 하는 존재로 여기곤 했는데, '여행'이 주는 낯설음은 내게 잊고 있었던 어떤 '인류애'같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허무맹랑하다 여길지 모르겠지만, 여정 내내 내게는 그런 순간이 수없이 찾아왔다.
오래된 전철역사 안에서 구슬픈 음악을 연주하는 아저씨, 시끄러운 소음을 내며 열차가 덜컹덜컹 거려도 책에 푹 빠진 멋쟁이 할아버지, 흐르는 강물을 멍하니 쳐다보며 맥주를 마시는 청년, 거센 바람에도 담배를 맛있게 피고있는 아가씨, 머플러를 꽁꽁 싸매고 걸음을 재촉하는 할머니, 사진 남기기에 여념없는 등산복 무리의 한 아주머니, 커다란 총을 메고 거대한 에펠탑 대신 오가는 행인만 쳐다보는 군인, 심드렁한 표정으로 크레페에 누텔라잼을 바르는 동남아계열의 점원, 빨간색 삼각 수영복을 입은 켄터키 치킨 할아버지 만큼이나 배가 불뚝하고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 모두 하늘 아래 같은 한 '인간'으로서의 '사람'.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몰라도 수식어란 필요없이 그저 같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떤 무한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인간은 그저 잠시 이 세상에 여행중인지도 모른다. 혹은 성경의 '나그네' 처럼. 그런데 언제부턴가 너무 익숙해져서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그 어떤 수식어 없이도 가능하고, 낯설음이 마땅한 것이 본래 '여행'인 것을.. 아마도 의식적으로 낯설음을 덮고, 갖은 수식어로 불편함을 가려서, 편하고 익숙하도록 획일화시키는 것이리라. 물론 한낱 피조물인 인간이 삶의 본질이나 의미가 무엇인지 알리가 만무하지만, 그게 무엇이든간에 하루하루 매 순간을 '여행'하는 '인간'이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