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두리스트는 저급해야 된다
운동이든 책읽기든 몇년간 지켜오던 루틴이 깨지면서
"미루기"라는 녀석이 나를 덮쳐오던 어느날,
오늘도 중딩딸과 이야기를 나누고 기록한다
나(엄마)- 매번 “아~ 내일 하자, 내일 하자” 이러고 있는 거야.
딸(쥬) - 우리 어머니가 매사에 내일 하자~~~~ 하고 있는 거구나.
근데 있잖아,어제 말했던 내일이 오늘이야.
어제의 내일이 바로 오늘이란 말이지.
나(엄마) - 음… 별로 안 와닿아. 맨날 듣던 말이야
더 센 말 없니?
딸(쥬)- 경고성으로 드린 말씀이에요.어머니~~
연골마저 녹이기 싫으시면
나가서 걷든, 뛰든, 필라테스를 하시든 뭐든 하세요.
그날부터 지유는
“투두 리스트는 저급해야 된다”는
인생의 새로운 원칙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딸(쥬)- 엄마, 투두리스트를 만들긴 만들어 봐, 내가 쓰는 방법이야
근데 너무 고급지면 안 돼. 투두리스트는 저급해야되
난 요즘 이렇게 써.
영어 단어 암살시키기
수학 조지기
센(전국민이 다 푸는 수학문제집 이름) 이랑 담판짓기
과외쌤이랑 다이다이 맞다이 까기
“드루와~ 드루와~ 과외쌤 맞다이로 드루와~”
이러면서 캘린더 체크하는 거야.
그러면 넌 그냥 끝난 거야.
“너가 뭔데? 별것도 아닌 게~” 하면서.
엄마 그럼 너무 웃긴데…
이상하게 힘도 난다. ㅋㅋㅋ
나(엄마)- 그래도 내가 걷기조차 안 한다면?
딸(쥬)-
종아리 근육 패기 개패기.
허리 근육 고문하기.
허리 비명 데시벨 측정하기
이렇게 적어놔봐..
나(엄마)-
근데 운동도 심각한데 요샌 책도 안 읽어.망했어
맨날 바디프렌드에 누워서 유투브만 보게 되
딸(쥬)- 어이구.. 어머니~~~.. 이름 바꾸세요 ~~~
"바디프렌드 말고 베스트 프렌드라고"
음… 그럼 이건 어때?
책 전치 14주 만들기
소설책 의료보험 부수기
책 갈기갈기 갈겨버리기
나(엄마)- 근데 있잖아.
난 저급한 것보다 우아하게 하고 싶긴 해.
단어가 우아하면 동기부여도 더 생길 것 같아.
딸(쥬)-
"아~ 그럼 컨셉 플레이질을 해야지.
난 공부할 때 항상 플래너에 컨셉을 만들어."
예를 들면
“몰락한 귀족 가문의 영애”. 컨셉을 만들어놓고,
-오늘의 메모-
우리 가문이 멸망한 지도 어느덧 한 달째.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이 가문, 내가 꼭 살려내겠습니다.
이렇게 적어두고 공부하는 거야.
내가 푸는 수학 문제는 곧 가문의 가계부고,
내가 외우는 영어 단어는 마법 주문이 되는 거지.
그래서 물 마실 때도
" 김집사~~~세바스촤아아안~~” 이러고,
목마르면
“세바스찬… 정말이지.”
(컵을 보면서)
“서민들의 컵이란…” 한 번 해주고,
(샤프를 보면서)
“이게… 샤프라는 건가…”
"아 걷는 건 오랜만이네.한 14년 만인가?
"내가 마차만 타고 다녔거든.
교양을 쌓아야겠군."
그러면서 막 국어책을 읽고 문제를 풀어제껴
그러면 이상하게 막 풀린다니까~~~
나(엄마) - 그래 좋은 생각이다
나 그러면.. "책과 교양쌓기" 라고 쓸래
딸(쥬)-
항상 드라마보면 부자들이 그러잖아.
“교양 없게스리~~~~”
엄마는 그럼 우아하게 책과 교양쌓기로 적어놔봐
그날 이후 회사일로 단조롭게 짜여진 명사형
내 캘린더를 의도적으로 바꾸기 시작했고
실제로 기분이 좋아지는 마법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기록하는 그 순간의 내 무드와 감정을 담아
단 2~3초 컷으로 제목을 달 뿐인데,
막상 그날 그 시간이 되면,
절로 헛웃음이 난다 ^^
오늘의 일정
책과 교양있는 척이라도 해 볼것
가문은 천천히 살릴것. ㅋㅋ 이라고 적어야겠다
(아래는 내 캘린더일정부분이다.
누구나 명사형 대신 형용사+계획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 질 수 있다 )
아래는 딸(쥬)의 캘린더 투두리스트 ^^
-저의 모든 글을 15살 딸과 함께 나눈 대화를 녹취해서 그대로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