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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Jun 24. 2021

폭신촉촉 왕돈까스




요 며칠 동안 돈까스가 계속 아른거렸다.

거짓말이다. 돈까스는 언제나 아른거린다.     

업무차 들른 동네에서 이달의 돈까스 할당량을 채우기로 했다. 아무래도 낯선 길이라 친절한 카카오맵의 도움을 받으며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웅웅


뭐지, 웬 알림이 갑자기?


와씨 이게 뭐람? 그동안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모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라는 탈락 메일만 받으면서 내 글은 어디가 부족한 걸까.. 고민만 한가득이었는데, 그러면서 아무도 못 보는 작가의 서랍만 공허하게 여닫기를 몇 달을 반복했었는데.. 이제 서랍 속에 글들을 하나 둘 꺼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요 며칠 동안 자존감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이건 진짜다. 직장 생활의 고단함은 자존감에 천적이다.

그러던 차에 합격 소식을 들으니 뭔가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잃었던 자존감이 다시 자라나고 있었다.

봤지? 나 이런 사람이야!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런 날에 그냥 돈까스 같은 메뉴는 어울리지 않는다. 식사의 격을 올려 오늘을 기념해야겠다.


“이모 여기 왕돈까스 하나요.”

제가 지금 기분이 왕 조크든요. 돈까스도 왕으로 먹어야겠어요. 헤헷



아담한 가게에 앉아 고소하게 튀겨지는 향을 음미하고 있자니 금세 오늘의 왕돈까스가 등장했다. 이 집은 한 덩이가 왕으로 큰 돈까스가 아니라 여러 장을 한데 모아 왕따시만하게 차려주는 모양이다. 내 취향은 그냥 크기가 왕인 녀석보다는 이렇게 옹기종이인 녀석들이다. 같은 양이어도 한 덩이보단 여러 덩이가 있어야 제일 바삭하고 맛있는 돈까스 가장자리를 더 많이 즐길 수 있다. 음 훌륭해 브런치 기념일을 장식하기에 손색이 없는 메뉴다.     


나는 똑같이 칼질하는 메뉴라도 저마다 다른 방식을 고수한다. 스테이크류는 한 번에 썰지 않고 그때그때 먹을 만큼을 잘라서 먹는다. 그래야 고기 본연의 육즙과 온기를 잃지 않고 탱글탱글 부드러운 식감과 풍미를 오래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돈까스는 다르다. 먼저 한 입 크기로 다 썰어놓고 먹는다. 그래야 공기에 닿은 고기의 단면이 더 단단하고 탄력 있는 식감이 되기는 개뿔 그냥 뜨겁기 때문이다. 얇은 고기를 고온의 기름에 튀겼기 때문에 갓 나온 돈까스는 대부분 엄청 뜨겁다. 그리고 돈까스는 왠지 크게 잘라 입안 가득 먹어줘야 더 맛있게 느껴진다. 그래서 미리 썰어놓아 적당히 식혀가면서 우걱우걱 맛있는 식사를 준비한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지체 없이 가장 탐스러운 녀석으로 맛을 보기로 한다. 한입 가득 큰 조각을 우물거리면 소스가 낭낭하게 배어든 돈까스의 윗면이 다소 퍽퍽할 수 있는 살코기에 촉촉하게 생기를 더해준다. 거기에 아직 바삭함이 남아있는 아랫면이 살포시 어우러지며 자칫 물렁할 수 있는 한입에 재미있는 식감을 더해준다. 거기에 새콤달달 부드러운 소스가 잠자던 침샘을 톡톡 터트리며 그 맛을 완성 시킨다.



이번엔 샐러드랑 같이 한 번 맛봐볼까? 음음 돈까스만 먹었을 때에 비해 아삭한 식감이 더해지고 양배추의 달달 쌉싸름함이 끝 맛을 깔끔하게 마무리해 준다. 아, 그런데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 샐러드에 들어가는 케찹의 새콤함과 돈까스에 뿌려진 소스의 새콤함이 서로 투닥이며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게 강력해진 새콤함이 다른 맛을 압도해버린다. 튀김류의 고소함도, 소스의 달달함도 그 힘에 한 풀 꺾여버린다. 신맛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에겐 이 만남이 별로 달갑지 않다. 안되겠다. 샐러드는 중간중간 입가심으로 먹어야지.     


한창 식사를 즐기고 있는데 문득 떠오르는 조합이 있었다. 푸서유기의 이수근님이나 맛있는 뚱뚱이들의 문세윤님이 추억의 맛이라며 돈까스에 밥과 샐러드를 함께 비벼 먹는 일명 ‘비빔돈까스’를 소개했던 장면이 떠오른 것이다. 그걸 본 이후로 저게 대체 무슨 맛일까 항상 궁금했었는데 마침 지금 내 접시에는 비비기에 꼭 알맞은 재료들이 남아있었다.



그렇다면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않겠는가. 일단 슥슥 비벼 먹기 좋은 크기로 돈까스를 잘게잘게 잘라준다. 그리고 숟가락은 잠시 옆으로 밀어둔다. 어떠한 비빔이든 밥알을 뭉개지 않는 것이 중한 법이다. 오로지 포크와 나이프로만 작고 소중한 돈까스와 다른 재료들을 한데 모아 슬슬슬 조심스레 비벼준다.



흠. 막상 비벼놓고 나니 비주얼이 여엉 별로다. 시험 삼아 조금만 비벼보고 나머진 그냥 먹을 걸 그랬나.. 살짝 후회가 됐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으니 일단 한입 가득 맛을 보기로 한다.



와앙 흠흠흠.. 오? 이거 뭐지? 생각보다 맛이 꽤 괜찮다! 샐러드와 돈까스만 같이 먹었을 때는 새콤함이 너무 강해서 별로였는데 쌀알의 전분기가 천방지축 새콤이들을 포근하게 감싸준다. 덕분에 마요네즈의 고소함과 브라운소스의 달큰함이 배가되어 새콤달콤 부드러운 맛을 선사한다. 양배추가 품은 쌉싸래한 맛도 요 달달함에 녹아들어 세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너무 달지도 느끼하지도 않게 맛의 중심을 든든히 잡아준다. 누구 하나 돋보이는 녀석 없이 최적의 밸런스를 갖춘 맛의 황금비율이다. 거기에 바삭하고 폭신하고 아삭한 식감들이 지루할 새도 없이 다채롭게 어우러진다. 뭐야 이 조합. 최고잖아?! 왜 진작 이 방법을 몰랐을까. 앞으로 돈까스를 먹을 땐 이렇게 비빔으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이 맛의 조화는 마치 닭갈비는 볶음밥으로 마무리하는 한국인의 식계명처럼 하나의 진리로 새겨놓을 가치가 있다.     


새로운 경험은 언제나 설레고, 신기하고, 즐겁고, 기대된다. 처음 만난 브런치 작가라는 이름이, 그간 알지 못했던 먹음직한 맛의 조합이 다소 칙칙했던 흑백의 일상에 작은 반짝임을 더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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