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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Jun 17. 2021

뜨끈뜨끈 순대국밥

우중충한 하루는 역시 뜨끈한 국물이지




우중충한 날씨 때문인지 고단한 업무 때문인지 온몸이 여엉 찌뿌둥하다.


요 며칠 흐리고 꿉꿉하더니, 오후부터 추적추적 비가 오기 시작한다. 고대했던 퇴근길도 축축 쳐지기만 하는 것이 그다지 기운이 나지 않는다.

안 되겠다 오늘은 국밥각이다. 이런 날은 뜨끈한 국물이 필요하다.



이른 저녁시간이어서 그런지 손님은 나 하나뿐, 금세 밑반찬이 차려진다.

도란도란 여러 개의 찬들이 어우러진 상에 금세 시선을 빼앗긴다. 들고 있던 스마트폰은 잠시 순위에서 밀려난다.

깍두기에 김치, 오이무침까지. 빨간 채소들에서 풍기는 새콤한 향내가 기분 좋게 침샘을 자극한다. 축 쳐진 기분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시큰둥했던 입맛이 살살 돋아나기 시작한다.



냉큼 오이무침 하나를 베어 물어본다. 음.. 근데 조금은 아쉽다. 새콤달콤상큼한 맛을 상상했지만, 가장 기대했던 달콤이가 없었다. 이모님이 설탕을 잊으신 걸까. 아니면 경건한 자연주의자이신 걸까. 약간의 아쉬움은 살짝 밀어 두고 잠시 어른의 맛을 즐기기로 한다.



잠시 후 보글보글 순대국이 내 앞에 놓인다. 고소한 들깨와 향긋한 부추가 잘 스며들도록 휘휘 저어준다.

그러다 보면 입천장을 데쳐주겠노라 열렬히 부글거리던 국밥이 딱 좋은 온도로 차분하게 진정된다. 그리고 차가웠던 숟가락은 국밥의 온기를 넘겨받아 따뜻하게 기분 좋은 온도가 되어준다. 그렇게 모든 것이 좋아지는 때에 한 숟갈 가득 뜨끈한 국물을 들이켠다.


"후루룹 크어허"


한국인의 힐링사운드가 절로 나온다.

빗줄기의 쌀쌀함에 굳은 몸이 스르르 녹아내는 소리다.

일상의 고단함에 먹먹하던 가슴에 숨구멍이 뚫리는 소리다.



국물 안에 낙낙하게 들어있는 쫄깃 고소한 피순대도 빠트릴 수 없다. 특히 요런 녀석들은 새우젓에 찍어 먹기보단 새우를 살짝 올려먹는 것이 좋다. 그래야 새우젓이 잔뜩 묻은 소금순대를 만들지 않을 수 있다. 순대 피에 감싸인 포슬포슬한 순대 속이 입 안에 풀어지며 고소하고 슴슴한 맛이 느껴질 때, 짭조름한 새우 향이 톡 터지면서 모든 맛을 감싸주는 최고의 어울림은 새우를 토핑으로 올려먹어야 비로소 즐길 수 있다.



순대 옆에 머리 고기도 새우를 올려서 먹어준다. 살코기 부분은 담백하고 고소하지만 조금은 퍽퍽할 수 있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지금 내 앞에는 뜨끈한 국밥이 놓여있다. 살짝 건조해진 입 안에 고기를 머금은 채로 뜨끈한 국물 두어 숟갈을 함께 호록여 주면 금새 촉촉하고 담백 쫄깃한 고기를 맛 볼 수 있다.



그래도 역시 내 입맛엔 기름기가 낭낭하게 붙은 부위가 제일이다. 쫄깃하고 부드러운 비계는 살짝 느끼할 수 있는데, 밥을 함께 먹어주면 쌀알과 지방의 고소함가득 남는다. 혹시나 느끼함이 남는다면 새콤한 깍두기로 살포시 달래주도록 하자.



이쯤에서 고백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나는 국물에 밥을 말아먹는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이따금 국밥에 진심이신 선비님들께 그건 어느 오랑캐에게 배워온 못된 버릇이냐며 호된 눈초리를 받기도 하지만 취향이 그런 것을 어찌하랴.


나는 득한 건더기를 꼬들한 밥과 함께 즐기고, 뜨끈한 국물만 따로 즐기는 것이 좋다. 그래야 각각의 매력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비록 밥은 말지 않을지언정 국밥의 피날레인 뚝배기 기울이기는 거르지 않고 실천하고 있으니 너무 노여워는 말아주시길.


누가 뭐라 뚝배기를 기울여 마지막 국물까지 싹싹 비우는 것은 쉽게 거를 수 없는 하나의 의식에 가깝다. 아이도 어른도, 심지어는 한국을 맛보는 외국인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뚝배기를 기울인다.


딸그락 딸그락


이 즈음 들는 소리가 다. 끝나가는 식사의 아쉬움을 담아내는 배기 소리가 그것이다. 스테인리스도, 도자기 그릇도 흉내 낼 수 없는 뜨끈한 뚝배기만의 울림이다.


뜨끈한 국물 덕분인지 정겨운 울림 덕분인지 고단했던 하루가 노곤하게 위로받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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