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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Jul 04. 2021

매콤칼칼 마파두부




왠지 매콤하고 자극적인 맛이 끌리는 날이 있다. 푸라면 이상의 매운맛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 맵찔이도 가끔은 빨간 맛이 필요하다.     


요 며칠간 스트레스가 조금 많았나 보다. 내가 썩 잘하지도 못하고 자신도 없지만, 그럼에도 내게 주어진 ‘해야 하는’일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어색한 역할을 덧입고 있으니 기를 펴기도 힘들고 컨디션도 영 좋지 않았다.    


스트레스엔 맛있는 음식이 최고의 명약이다. 매콤한 게 끌리지만 너무 매운 건 위험하니 적당히 매콤하고 자극적인 마파두부를 먹어야겠다.


주문을 마치니 노랗고 새콤한 단무지와 빨갛고 매콤한 짜사이가 등장한다. 요 녀석을 처음 봤을 땐 ‘이게 뭐지? 호박인가?’싶었는데, 찾아보니 갓의 한 종류라고 한다. 오오 갓김치는 비싸서 자주 사 먹기 힘든데 지금 내 앞에 대륙의 갓이 놓여있었구나. 왠지 친숙한 단무지보단 오독오독 짭짤한 짜사이에 손이 더 많이 가게 된다



마파두부와의 만남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센 불에 빠르게 볶아내는 덕분인지 주방에서 퍼지는 맵칼한 향기가 느껴진다 싶으면 어느새 따끈한 음식이 내 앞에 놓인다.



자세히 보면 마파두부는 꽤 다양한 재료들을 품고 있다. 주인공인 하얗고 네모난 두부는 물론이고 길쭉하게 썰어낸 돼지고기와 죽순, 파랗고 빨간 아마도 파프리카들, 거뭇거뭇 말캉한 버섯까지. 그저 주연이 두부일 뿐 각양각색의 명품 조연들이 한데 어우러진다.



어느 재료 하나 빠지지 않게 한 스푼 가득 맛을 본다. 첫맛은 콤콤 칼칼 짭짤한 두반장이 불향을 가득 머금고 마중을 나온다. 이어서 말캉하고 부드러운 두부의 식감 뒤에 수줍은 듯 빼꼼히 버섯의 풍미가 더해진다. 고슬고슬 쫀쫀한 밥알들이 모든 재료를 포옥 감싸주는데, 사이사이 단단한 채소들이 통통 튀며 아삭아삭 재미있는 식감을 만들어준다. 이렇게 다양한 재료들이 이리도 조화로운 맛을 만들어주다니! 오물오물 기분이 한껏 좋아진다.



그 와중에 강하게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는 녀석들이 있었다. 길쭉길쭉 죽순과 고기 그 녀석들이다. 맛있는 식탁에서 소외되는 친구가 있어서는 안 되는 법, 따로 맛을 보기로 한다.


죽순은 도드라지는 풍미가 느껴지진 않지만, 적당히 아삭하고 말캉한 식감에 짭짤한 소스를 가득 머금고 있다. 이 녀석이 소스가 흩어지지 않게 꼭 붙들어준 덕분에 더 진하게, 더 재미있게 풍부한 맛을 즐길 수 있다.


살짝 튀겨 소스를 입힌 돼지고기는 폭신폭신 쫄깃 고소하다. 얇은 튀김옷에 배어든 소스가 짭짤한 풍미를 더해준다. 얇은 탕수육을 먹는 것 같기도 하고 길쭉한 모양 때문인지 굵은 파스타면 같기도 하다. 그것도 가운데에 탱글한 심이 살아있는 알단테 같달까? 산속 깊이 숨은 은거 고수처럼 상당한 내공이 느껴진다.



카메오 같은 포지션의 짜사이지만 너무 소외되는 것 같아 한번 챙겨주고 싶어졌다. 수저 위에 올려 함께 먹어보기로 한다. 큰 기대 없이 즉흥으로 만든 조합이건만 갓 나온 마파두부의 뜨끈한 매콤함과 다소곳이 기다리던 짜사이의 시원한 매콤함이 뜻밖에 조화를 이룬다. 온도가 다른 둘이 섞이며 중간 점을 찾아가는 동안 폭신함과 아삭함, 짭짤함과 달큰함이 어우러지는 맛의 대류가 입안 가득 느껴진다. 오호 이 조합, 나쁘지 않다.



명품 조연들을 만끽하다 보니 주인공의 단독무대가 궁금해졌다. 두부로만 채운 한입은 보들보들 고소함이 가득하다. 통통한 모양새 때문인지 소스가 깊게 배어있지 않아 의외로 슴슴하니 자극적이지 않은 맛이다. 지금껏 매콤하고 칼칼하게 강렬한 맛을 선사해 준 마파두부였는데 오히려 주재료인 두부는 이렇게 얌전하고 소박한 맛이라니. 내심 기대했던 것과 다른 주인공의 역량이 살짝 뜻밖이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주인공이라고 꼭 화려하고 강렬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그건 그냥 내 편견이었다. 그리고 사실 두부가 좋아서 주인공이 된 것도 아닐 것이다. 그저 마파두부를 처음 만든 부모뻘의 누군가가 음식 이름에 두부를 붙여주고 멋대로 주재료의 역할을 기대했을 것이다. 괜시리 두부에게 미안해진다. 내가 아닌 누군가의 기대가 짐이 되어 역할을 강요받고, 진짜 나다운 본질적인 맛을 잃어버릴 필요는 없다. 두부는 두부다움으로 그 역할을 다해주고 있다.


만일 두부마저 본래의 슴슴하고 고소한 맛을 버리고 강렬한 맛을 덧입고 있었다면 마파두부는 너무 짜고 맵고 자극적이기만 한 그저 그런 취급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주인공의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전체적인 조화를 만들고, 그 조화가 이리도 훌륭한 맛을 이끌어냈다.


문득 예전에 들었던 말이 생각난다. 카리스마라는 말의 어원은 ‘신이 내게 주신 선물’이라고 한다. 누군가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가장 나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게 가장 카리스마 있고 당당한 모습이다. 비록 그것이 강렬히 드러나지 않는다거나 주류가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잊었던 문장이 다시 떠오를 만큼 맛있고 또 만족스런 식사였다. 아마도 조만간 이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다시 만나러 오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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