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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Jul 08. 2021

호록호록 우육탕면

feat. 샤오롱바오




식사 때를 놓쳤다.

배도 별로 안 고프고 점심을 든든하게 먹었으니 저녁은 걸러야지 생각했던 게 실수였다. 저녁과 야식 사이 애매한 어느 때에 급격히 허기가 밀려왔다. 스스로의 위장을 무시하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 온 신경이 예민해지고 작은 일에도 짜증이 샘솟는다. 큰일이다. 맛집을 검색할 여유가 없다. 어서 허기를 달래야 한다.


마땅한 식당이 보이지 않아 난감하던 찰나, 호기심을 자극하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즐겨 먹는 메뉴는 아니지만, 이 호기심을 그냥 지나치기엔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는 위장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서둘러 주문한 음식은 다행히 내 마음처럼 서둘러 나와 주었다. 오늘의 메뉴는 우육탕면과 샤오롱바오다.



빨간 국물 위에 노란 면과 초록초록 채소류, 하얗고 쪼글쪼글한 건두부가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건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음식이 나온 순간부터 온 신경이 후각에 집중된다. 맵칼하고 자극적인 향은 그만큼 매력적이다. 한 스푼 뜨끈하게 떠먹은 국물은 구수한 고기 육수에 매콤하고 짭짤한 맛이 딱 맞게 어우러진다. 여기에 약간의 마라향이 기분 좋게 혀끝을 자극한다. 너무 매워 미각이 마비되는 숭악한 빨간 맛이 아닌, 적당히 매콤 칼칼 착한 빨간 맛이다. 자주 맛보는 음식은 아니지만 왠지 모를 친숙함이 느껴진다.



국물 맛을 보고 나니 뱃속의 맹수가 난리가 났다. 서둘러 탄수화물을 공급해 주기로 한다.

후루루룩 후룩. 기분 좋은 소리로 한가득 입에 넣은 면발은 탱글탱글 보드랍게 넘어간다. 다소 자극적인 육수를 적당히 머금고 있어 맛은 더욱 부드러워졌고, 구수한 국물 맛을 꼭 붙들고 오물오물 오랫동안 입안에 머무르게 해준다.


그 순간 조금 전에 느꼈던 왠지 모를 친숙함의 정체가 떠올랐다. 이것은 오래전 군 복무 시절 동계 야간 경계근무가 끝나고 선임이 먹고 자라며 던져주었던 바로 그 컵라면과 비슷한 맛이었다. 손톱 끝까지 꽁꽁 얼어있던 몸이 발끝까지 사르르 녹아내리는 짜릿한 맛에 감동하느라 상표는 기억하지 못했었는데, 그게 우육탕면이었구나! 그때 참 맛있게 먹었었는데, 그 형은 잘살고 있으려나 문득 옛 전우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아련한 추억과 묘한 PTSD가 공존하는 신기한 감정이 느껴진다.



옛 추억은 잠시 뒤로하고 지금 내 식욕에 다시 집중해본다. 가장 궁금한 고기와 건두부를 맛봐보자.

고기는 말캉말캉 보들보들 신기한 식감이다. 거기에 살짝 붙은 지방이 순간의 아삭함을 제공하며 더욱 재미있는 식감을 만들어준다. 따로 양념을 해주었는지 속까지 간이 잘 배어있다. 국물보다 더 짭짤하고 진득한 고기의 풍미가 느껴진다.

건두부는 마치 게살처럼 부드럽게 부서지면서도 약간의 탱글함이 남아있는 매력적인 식감을 가지고 있다. 그 자체로 진한 맛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쪼글쪼글한 표면 사이사이에 숨어있던 국물이 씹을 때마다 톡톡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 녀석, 재미있다.



이번에는 고기와 면을 함께 먹어본다. 처음에는 면이 머금은 진한 국물 맛이 느껴지다가 고기가 씹히는 순간 간이 강해지면서 국물의 향이 더 깊고 진해진다. 여기에 마지막까지 씹히는 짭짤한 고기의 풍미가 진한 여운을 남겨준다.



이제 슬슬 샤오롱바오와 어울려줘야겠다. 적당히 매콤 칼칼한 빨간 맛일지라도 맵찔이에겐 중간중간 하얀 맛을 동반해 주는 게 좋다.



보통 샤오롱바오는 옆구리를 톡 건드리면 육수가 졸졸졸 새어 나온다. 그래서 꼭 수저 위에서 의식을 치러줘야 한다. 하지만 오늘 만난 샤오롱바오는 몸값이 높지 않은 친구라 육수를 가득 머금고 있지는 않았다. 뭐,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맛만 좋으면 그만이지.



수저 위의 작은 만두는 잘 쪄낸 돼지기름과 약간의 고소한 향이 섞여 전반적으로 진득한 기름진 맛을 뽐낸다. 만두소에 참기름 톡톡이면 이런 맛일까 싶은 풍미가 입안을 부드럽게 코팅해 준다. 거기에 간장의 새콤짭짤함과 고기의 슴슴함, 만두피의 쫄깃함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마지막으로 함께 올려 먹은 생강채의 알싸함이 기름진 느낌을 깔끔하게 마무리해 준다.



하얀 맛으로 입을 달래서인지 맵찔이의 도전정신이 쓸데없이 강해졌다. 테이블에 놓여있는 매운 소스가 눈에 들어왔다.

‘한 번쯤은 괜찮지 않을까?’ 이런 대사는 보통 사망 플래그로 사용된다. 영화 보면 이런 애들이 제일 먼저 사라지던데. 하지만 쓸데없이 용감해진 맵찔이는 모험을 감행하기로 한다.



노란 면 위에 무시무시한 빨간 소스가 내려앉았다. 이제라도 그만둘까 싶지만 그러기엔 맛있는 면을 포기할 수 없다.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머뭇머뭇 입에 넣은 빨간 소스는 의외로 상당히 괜찮았다. 살짝 매콤한 마라의 향에 은근히 짭조름한 간이 배어있어 본래 우육탕면의 풍미를 한껏 끌어올려 준다. 우육탕이 아이언맨이면 빨간 소스는 헐크버스터랄까? 시너지가 참 잘 맞는 최고의 서포터다. 괜히 쫄지말고 진작 넣어 먹을걸. 다음에 방문하면 과감하게 더 다채로운 맛을 즐겨야겠다.


계획에 없던 늦은 식사에 문득 떠오른 오묘한 추억, 잔뜩 경계하던 빨간 맛이 선사한 맛 좋은 경험까지. 예상치 못한 일들이 소박하게 재미있는 시간을 만들어주었다. 가끔씩은 이렇게 계획도 검색도 없이 별안간 찾아오는 낯선 기회들을 오롯이 즐겨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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