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몇 가지 비극이 존재한다. 원수지간에 꽃 피는 연인의 사랑 이야기나 아버지를 살해한 숙부에게 복수하는 왕자 이야기, 혹은 배부른 자의 눈앞에 홀연히 나타나는 맛있는 음식이라던지.
얼마 전 나에게도 그런 비극이 찾아왔다. 맛없는 식사로 잔뜩 배를 불리고 귀가하던 길에 엄청난 향기를 감지한 것이다. 구수함과 매콤함, 거기에 자글자글 기름기가 구워지는 향기는 이미 배부른 자의 발걸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포도를 눈앞에 둔 여우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아무리 맛있어 보여도 어쩔 수 없다. 뱃속은 이미 가득 차 있다. 이따금씩 느끼지만 내 위는 왜 이것밖에 안되는 걸까. 이 비극의 원흉이 있다면 너 때문일 거다 이 녀석아.
괜시리 울적해진 날, 이전의 비극이 떠올라 다시금 그 장소를 찾아갔다. 며칠간 눈앞에 아른거린 주인공은 이름만으로도 설레는 주물럭 청국장이다.
식당 가득 기분 좋은 향에 기분이 좋아진다. 거기에 설렘 포인트가 하나 더 있다. 무려 주물럭이 제일 먼저 상 위에 올라온다. 발그레한 주물럭 고기 위에 하얀 초승달을 닮은 양파들이 송송송 담겨있고 그 위에는 삐죽빼죽 초록빛의 부추들이 소복하게 담겨있다. 타다다다닥 화륵. 버너에 불이 켜지는 소리마저 군침이 넘어가는 최고의 비주얼이다.
자글자글 주물럭이 금세 익어가기 시작한다. 지방이 익어가는 고소한 향기가 솔솔 피어오른다. 인내심의 한계가 점점 가까워진다. 얼른 먹고 싶은데. 어서 빨리 익어주겠니?
가만히 주물럭으로 고기멍을 하고 있자니 어느새 한 상 가득 음식들이 등장한다. 고소한 고기 냄새에 집중하던 후각세포가 슬며시 시선을 빼앗긴다. 구수한 청국장 냄새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
보골거림이 잦아든 뚝배기 안으로 오밀조밀 재료들이 눈에 들어온다. 주물럭을 기다리느라 힘들었던 찰나 오동통한 두부며 버섯에 애호박까지 이렇게 먹음직스런 조합이라니. 아, 이건 못 참지.
한 숟갈 그득히 청국장을 맛본다. 특유의 구수하면서 쿰쿰 짭짜름한 맛이 온 입안을 감싼다. 밀도가 높아 진득한 느낌이 아닌 국물 가득 깔끔한 느낌이건만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는 향기에서 선조들의 발효과학이 낭랑하게 느껴진다.
보글보글 소리에 맞춰 나풀나풀 흩날릴 만큼 얇게 썰어낸 두부는 이 세상 부드러움이 아니다. 햇볕에 잘 말린 이불에 폭신폭신 얼굴을 부빈다면 이런 기분일까? 뜨끈뜨근 보들보들한 식감에 쿰쿰 짭짤한 맛이 가득 배어있다. 청국장의 구수한 아이덴티티는 쫄깃한 버섯 안에서도, 포삭포삭한 호박 안에서도 어김없이 반가운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제 청국장의 잠재력을 폭발시킬 차례다. 내 앞에는 참기름이 담긴 큰 그릇이 있다. 이 녀석이 바로 이 이벤트의 무대가 되어준다. 자, 시작해볼까?
그릇 안에 밥을 텁
밑반찬을 찹찹찹찹
청국장을 척척
고추장을 쪼롭쪼롭
이 모두를 한데 모아 슬슬슬 섞어주면 그 모습도 영롱한 비빔밥이 완성된다. 소외되는 재료가 없도록 사이좋게 한데 모아 입으로 가져와 준다. 청국장에 비빈 밥은 촉촉해진 쌀알에 온갖 다채로운 맛들이 한데 어우러진다. 콩나물은 짭짤아삭 무생채는 새콤달콤 애호박은 말랑보들 열무김치는 새콤 아삭 짭조름하다. 마지막으로 포스스 부서지는 두부의 식감은 그야말로 화룡점정이다. 그 어렵다던 건강하게 맛있는 한국인의 밥상이 여기 있다.
잠시 잊고 있던 친구가 옆에 있다. 매콤한 향기과 지글지글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어필하고 있다. 어느새 주물럭이 예쁘게 잘 익었다. 이젠 참을 이유가 없지. 서둘러 젓가락을 집어 든다.
주물럭은 지방과 살코기가 적절히 분배되어 있다. 고소하고 쫀득한 기름기와 부드럽고 탱탱한 살코기의 식감에 빨간 양념이 매콤달콤 어우러진다. 큰일이다. 이 맛, 집에 가면 또 생각날 것 같다.
머리는 미각세포에 집중하면서도 손은 빠르게 움직인다. 어느새 주물럭은 비빔밥과 함께 수저 위에 올라가 있다. 주물럭과 비빔밥이 함께하는 한 입은 부드러운 비빔밥이 고기를 싸악 감싸는 틈틈이 고기가 씹힐 때마다 매콤짭짤한 주물럭의 풍미가 느껴진다. 슴슴한 맛과 자극적인 맛이 번갈아 등장하며 멋진 호흡을 자랑한다. 왜 이 둘을 한 메뉴에 넣었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삼겹살에 소주 치킨에 맥주가 있다면, 주물럭엔 역시 청국장이다.
감탄스런 맛은 언제나 여러 가지 조합을 시도하게 한다. 이번에는 한국인의 본능을 꺼내본다. 파릇한 상추 위에 비빔밥을 턱 주물럭을 척 마늘 한 알에 쌈장 한 꼬집을 슬며시 올려준다. 상 위의 모든 재료가 한 쌈에 담겨있다. 와앙 오물오물. 비빔밥의 부드러움이 모든 식감을 끌어안아준다. 아삭아삭 상추의 식감마저 이 부드러움에 몸을 맡긴다. 전반적으로 보들보들 슴슴한 맛이 매콤한 주물럭과 알싸한 마늘을 중재하며 조화로운 맛을 한껏 끌어올린다. 미각세포 하나하나가 잔잔하게 위로를 전한다. 그래, 이게 바로 힐링이지.
과거의 가슴 아픈 비극이 한 입 두 입 맛있는 희극으로 바뀌었다.
한껏 어두컴컴했던 기분이 금세 화창하게 맑아졌다. 이래서 식도락을 포기할 수 없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