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대로 계획대로 1도 되지 않았던 여행
몇 년 전부터인가 하코다테(函館) 여행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삿포로(札幌)를 여행할 때나 아오모리(青森)를 여행할 때마다 마음만 먹으면 3~4시간 안에 갈 수 있었지만, 짧은 일정에 억지로 끼워 넣기가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다음에 꼭 가야 할 곳'으로 동그라미 쳐서 묻어두고 있었다.
게다가 10년 전쯤 서울에서 아시아나 직항이 있었을 때, 그곳을 다녀온 후배가 "야경이 끝내주고 우니(ウニ, 성게) 덮밥이 너무 맛있고 싸서 4일 내내 우니동(ウニ丼)만 먹었다"며 몇 주를 자랑하는 바람에, 언젠가 한 번은 꼭 가리라 벼르고 있었다.
작년 11월 중순, 몇 가지 신경 쓰이던 일도 끝이 났고 도쿄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날도 봄쯤이 되지 않을까 싶어, 곧바로 1월 말 2월 초의 하코다테 여행을 기획했다. 항공과 숙박을 한 번에 해결하는 일본 항공사 JAL의 패키지(JAL パック)를 이용했다. 그리고 다사다난했던 2025년의 12월도 넘기고, 한 해 설계로 정신없던 1월도 무사히 넘겼다. 그사이 귀국일이 확정되었기에 좀 편한 마음으로 여행을 기다렸다.
Day 1
드디어 그날이 왔고, 10년 넘게 가슴에 품고 있던 하코다테 2박 3일 여행을 시작했다. 그런데 출발부터 뭔가 찜찜했다. 아침 9시 40분에 출발해야 할 비행기가 한 번, 두 번, 세 번에 걸쳐 탑승을 연기하는 바람에, 새벽같이 일어나 부지런히 공항에 온 시간들을 허무하게 만들어버렸다. 지상 근무자들이나 승무원들 모두 나의 소중한 1시간 지연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눈치여서, 여행의 시작이 마냥 산뜻하지만은 않았다.
한 시간 남짓의 비행 끝에 하코다테 공항에 도착했고, 한참을 기다려 짐을 찾아 하코다테 역(函館駅)으로 가는 리무진을 탔다. 일기 예보대로 날은 맑았지만, 멀리 산 쪽에는 눈이 반쯤 녹다 만 채 남아 있었다. 겨울 한가운데의 낭만적인 오타루(小樽)를 기대했는데, 겨울 끝자락의 질척이는 삿포로 정도로 기대감을 낮추어야 한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역에 내려 예약해 둔 오징어 회 맛집을 찾아가는데, 아니나 다를까. 눈과 얼음과 흙이 제멋대로 범벅이 된 길 위로 캐리어를 운반하는 건 이동이 아니라 노동이었다. 200미터 남짓한 거리를 캐리어를 밀었다, 들었다, 끌었다 반복하며 겨우 도착한 곳은 역 바로 옆 '아침 시장(朝市)'이었다.
원래 하코다테 시내 관광은 낭만 있게 트램(노면전차, 市電)을 타고 다닐 예정이었다. 하지만 눈이 녹았다가 다시 얼어붙어 울퉁불퉁하고 미끌미끌한 길바닥을 보니, 낭만 찾다 골병들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자칫 객기 부리며 돌아다니다가 낙상이라도 당하면, 남은 일정은커녕 며칠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싸하게 왔다. 그래서 결심했다. 이번 여행의 이동은 무조건 택시다.
겨우 도착한 아침 시장. 글쎄, 교토의 니조 시장(二条市場)이나 도쿄의 츠키지 시장(築地市場) 정도까지 기대한 건 아니지만(그건 언감생심이고), 그래도 활기찬 어패류 시장 정도는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그저 해산물 식당들이 모여 있는 상점가였고, 평점이 좋아 예약했던 식당은 기대했던 '제대로 된 오징어 회' 전문점이 아니라 해산물부터 야키니쿠(焼肉)까지 파는 이자카야(居酒屋)였다. 굳이 예약하지 않았더라도 언제든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곳이었다. 하코다테 첫 끼부터 뭔가 하나씩 접혀가는 기분이 들었다.
문득 몇 년 전 규슈의 요부코(呼子)에서 먹었던 오징어 회가 떠올랐다. 요부코 또한 오징어 회로 유명한 지역인데 '이카이키즈쿠리(イカ活き造り)'라고 해서, 주문 즉시 수조에서 오징어를 잡아 1분 안에 투명하게 회를 쳐줬다. 남은 부위로 오징어 슈마이(いかシュウマイ)와 부드러운 튀김까지 내어주는 풀코스 요리였다. 처음에 후쿠오카에서 2시간을 달려온다고 의아해하던 일행들이 "다음에 한 번 더!" 하며 무료 가이드인 나의 목을 조르던 기억이 있었는데... 홋카이도 오징어 동네에서 엉뚱하게도 규슈 오징어 동네가 소환당했다.
식사 후 하코다테 베이(Bay) 근처, 과거 운송 창고를 개조한 쇼핑센터 '카네모리 아카렌가 창고(金森赤レンガ倉庫)'로 갔다. 주류와 유리 공예 특산품을 파는 공간인데, 묘하게 오타루의 아카렌가나 오르골당의 하위 버전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도 내부 치장이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촌스럽고 화려한 '라키피에로(ラッキーピエロ)' 같은 하코다테만의 닭강정 햄버거 체인점이 있어 조금 만회는 했지만, 다음에 누군가 홋카이도 여행지를 추천해 달라고 하면 나는 단연코 오타루를 추천할 것 같다.
그래도 오타루보다 하코다테 베이가 훨씬 더 좋은 건 해변 근처에서 찍은 기념사진의 결과물이다. 해발 40cm 정도로 바다와 바짝 붙은 산책로 덕분에, 여행객의 등 뒤로 하코다테 산(函館山)으로부터 내려오는 석양빛이 바다로 살포시 앉아 반짝반짝 은물결을 만들고, 바닥에 깔린 눈들에 반사된 빛들이 인물을 비추니 어디서 찍어도 영화 같은 배경에 환한 주인공 같은 사진을 건질 수 있다는 거다. 게다가 괌이나 사이판처럼 구름들도 바다 가까이 쭉 내려와 있어 생각지도 못한 멋진 배경이 되어 주었다.
아침부터 진을 빼서인지, 빠른 저녁을 먹고 호텔에서 온천이나 하기로 했다. 원래는 양고기 맛집으로 소개된 '다이코쿠야(大黒屋)'나 '이이다야(いい田屋)'를 가려고 했으나, 도쿄보다 10도나 낮은 기온에 질척이는 빙판길을 걷기가 싫어 호텔 옆 **'메이메이테이(羊羊亭)'**에서 양고기구이(칭기즈칸, ジンギスカン)를 먹었다. 삿포로의 다루마처럼 오픈런을 할 필요도, 옆 손님과 어깨를 부딪힐 필요도 없었고 가격도 저렴했다. 이 정도면 한 끼 저녁 식사로 훌륭했다. 배도 부른 김에 호텔 13층 대욕장 노천 온천에 몸을 담갔다. 머리 위로 김이 날아다녔다.
Day 2
새벽 일찍 잠이 깼다. 어제 온천 사우나에서 땀을 너무 뺀 탓도 있고, 추위에 잔뜩 웅크리고 걸었더니 몸살 기운도 있었다. 나이가 드니 숙면을 하려면 몸 상태도 좋아야 하고 아프지도 말아야 한다. 잠이 깬 김에 호텔 로비로 내려가 무료 커피를 한잔했다. '하코다테 미스즈 커피(函館美鈴珈琲)'라고 하는데 어제부터 오가며 한 잔씩 마시고 있다. 하루 한 잔이 정량인 나의 루틴에서 벌써 석 잔째니, 새벽잠이 달아날 만도 했다.
하코다테 여행에서 생각지도 않았지만 정말 좋았던 것은 **'라비스타 하코다테 베이(La Vista Hakodate Bay)'**라는 호텔 숙박이었다. 우선 호텔 방 전면의 단단한 통창으로 하코다테 산과 모토마치(元町) 쪽이 가득 들어오고, 하코다테 만의 정경에 갈매기 무리, 까마귀 무리가 날아다니는 게 간혹 내가 보고 있는 것이 풍경화가 아닌 실화임을 알려준다. 이 창으로 3일 내내 하코다테의 흩날리는 폭설을 원 없이 감상했었다.
또한 이 호텔의 분위기가 아주 묘하다. 외관은 붉은 벽돌이고, 내부 바닥이나 가구는 검은색 옻칠이 되어 있다. 놀라운 것은 가구들의 검은 칠이 슬쩍슬쩍 벗겨져 있는데도 전혀 보수하지 않았다는 거다. 세월의 흔적을 즐기라는 듯이 그대로 두었다. 사람 키보다 훨씬 큰 벽시계가 가운데를 차지하고 양쪽으로 낡은 가죽 소파가 놓인 로비는 마치 1920~30년대 개화기 영화 세트장 같다. 저쪽 입구에서 <암살>의 이정재와 하정우가 중절모에 더블브레스트 슈트를 입고 걸어 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새벽 5시, 사람 하나 없는 텅 빈 로비에 멍하니 앉아 나는 나의 시간과 마주했다. 선잠에서 깨어날 때쯤 갑자기 들이닥쳤던 개꿈 같은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나누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참 새벽의 시간은 낮 시간과는 다른 빠르기로 지나간다. 다시 방으로 올라왔고, 잠시 눈을 붙인 뒤 조식을 먹으러 갔다. '일본 호텔 조식 랭킹 2위'라는 해산물 위주의 아침 식사는 명성답게 훌륭했고, 굳이 아침 식사를 위해 해산물 시장을 찾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둘째 날은 마음이 좀 바빴다. 유튜브 등에서 본 관광 명소를 섭렵할 생각이었다. 택시를 타고 '유노카와(湯の川) 열대식물원'으로 갔다. 원숭이가 온천을 한다는 그곳이다. 택시비 3,000엔, 입장료 300엔, 원숭이 사료 100엔이 들었다. 굳이 비용을 적는 이유는... 솔직히 좀 아까웠기 때문이다. 크지 않은 온실 하나와 원숭이 온천 하나가 전부인데, 시설이 낡은 건 어쩔 수 없다 쳐도 관리가 전혀 안 되는 느낌이라 안타까웠다.
다음은 1850년대 막부 말기 포대 건설을 위해 만들었다는 '고료카쿠(五稜郭)'로 이동했다. 별 모양의 해자를 파서 적을 막겠다는 요새인데, 지금은 공원이 되었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설경은 '중박' 정도는 되어 보였다. 다만 1층 라운지에서 '북방 영토(쿠릴 열도) 반환' 서명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관광객인 외국인에게까지 동참을 권하는 건 좀 당황스러웠다. 일본 국내 정치 이슈인데 말이다.
다음은 다시 택시를 타고 '하치만자카(八幡坂)' 언덕으로 갔다. 바다까지 도로가 시원하게 뻗어 있어 인생 샷 명소라고 한다. 그래, 그냥 인증샷 한 컷. 그러고 나니 오전이 끝났다. 호텔로 돌아왔는데 더 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오후 해 질 녘에 전망대 야경만 보면 하코다테 퀘스트는 끝날 것 같았다.
오늘 오전에 돌아다닌 것으로 하코다테 시내 관광은 아무리 검색해 봐도 더 갈 데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일 저녁 7시로 되어 있는 도쿄행 비행기 시간을 좀 앞당길 수 있을까 싶어 항공사에 연락했다. 그랬더니 항공 스케줄은 항공사가 아니라 여행사에서 했으니 그쪽으로 전화를 하라고 했다. 홈페이지에서 예약을 했는데 담당이 다르다고 스케줄 상담은 다른 쪽으로 하라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23분이나 걸려서 겨우 연결된 여행사 상담원은 "패키지라 변경 불가"라고 단호박이다. 예약 페이지에 빨간 글씨로 써 놨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어차피 짧은 일본어에 더 이야기해 봤자 감정 소비라 얼른 마무리하고 잠시 눈을 붙였다.
호텔에서 쉬다 다시 택시를 타고 '하코다테 로프웨이(函館山ロープウェイ)'를 타러 갔다. 그 유명한 '일본 3대 야경'을 보러. 그런데 이미 해 질 녘 정류장은 단체 관광객 버스로 가득 찼다. 케이블카 안에서는 사람에 갇혀 야경은 구경도 못 했고, 전망대에 도착해서도 앞줄을 선점한 사람들 등판만 보였다. 손을 뻗어 사진 한 컷 찍으려 해도 키 큰 앞사람들 탓에 어림도 없었다. 교토 청수사(清水寺, 기요미즈데라)에서는 앞사람들이 사진 찍고 나면 자리를 비켜주던데, 이곳 앞줄 분들은 경비원이 비켜 달라고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분들이었을까? 그 어수선한 틈바구니에서 겨우 앞사람 어깨 사이로 몇 컷 건졌다.
혹시나 했는데 아, 또 속았다. 나가사키(長崎)에서도 3대 야경이라 해서 차를 몰고 꼬불꼬불 산길을 운전해 올라가서 간신히 주차하고 올라갔다가 실망만 잔뜩 하고 내려오면서 다시는 일본 3대 야경 이런 말에 속지 말자고 다짐했었지만, 하코다테는 정말 다를 줄 알았다. 사진으로 보는 것으로는 하코다테가 정말 압권이었기 때문이다. 야경을 정말 사랑하는 분이라면 차라리 서울 '인왕산 여름 야간 산행'을 추천한다. 인왕산 야경은 정말 내 손목을 걸고 추천하는 맛집이다.
Day 3
아침을 먹고 나니 계획이 전무했다. 조식을 거하게 먹은 탓도 있지만, 둘째 날 할 일이 없어 온천만 두 번 했더니 몸이 노곤했다. 여행 3일째 날은 월요일이라 아무래도 어젯밤에 뜬 기사 하나가 신경이 쓰였다. 미국의 어떤 자리에 어떤 사람이 가는데 이게 금융시장의 파장이 작지 않다고 한 기사였다. 모바일 계좌로 주식 계좌를 슬쩍 보는데 계좌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여행 와서도 여전히 현실의 문을 닫아 버리지 못하는 게 한심하기도 하지만 어딜 보고 다닐 마음이 아니라서 베이 지역의 스타벅스(スターバックス) 2층에 가서 생각을 다듬기로 했다.
하코다테 베이의 스타벅스 2층에는 창가 쪽으로 1인용 소파가 놓인 명당이 있다. 어제 앉았던 자리 뒤쪽에 어제와 똑같은 사람이, 똑같이 짐을 쌓아두고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반대쪽 소파에 앉았다. 하코다테 날씨는 참 신기하다. 3일 내내 눈 예보는 둘째 날 오전뿐이었는데, 실제로는 3일 내내 폭설이 퍼붓다가 해가 쨍하고, 해가 떴는데 눈이 내리기를 반복했다. 스타벅스 창밖으로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물끄러미 '거리 멍'을 때리다 또 나 자신과 대화를 시작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길거리의 폭설을 보면서 내 속의 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계좌를 다시 봐야 한다는 조급함이 없어졌다. 아니 잠시 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다.
호텔 앞에서 회전 초밥으로 간단히 배를 채우고 공항으로 향했다. 택시비 4,000엔... 공항에서 체크인하는데, 두 달 전에 지정해 둔 좌석이 불과 3일 전 확인했을 때도 멀쩡하더니 갑자기 변경되어 있었다. 항의했더니 "기종이 바뀌어서 어쩔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어제 여행사는 "규정상 변경 불가"라더니, 자기들은 마음대로 바꿔도 되는 건가 싶어 화가 났지만, 더 싸워봐야 역시 감정의 소비만 더 될 것 같아 그냥 짐을 부쳤다. 그리고 다짐한다. 다음부턴 이 항공사는 영원히 안 탈 거야.
하네다(羽田)에 도착해 게이큐선(京急線)을 타고, 다이몬(大門)에서 오에도선(大江戸線)으로 갈아타고, 츠키시마(月島)역에 내려 10분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작년에도 한 해 내내 엇박자 더니, 올해 첫 여행부터 엇박자다. 하지만 자꾸만 '엇, 엇, 엇' 하며 엇박자로 비틀거린다 한들 어쩌겠나. 이 또한 흘러가는 내 인생인 것을, 가다 보면 또 가지겠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