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도쿄 라이프

닛코(日光), 시간이 멈춘 호숫가의 오후

by 하임


1.


도쿄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인다. 도쿄에서의 평일이란, 매일 아침 서로에게 무관심한 얼굴들이 가득한 전철을 타고 유라쿠초(有楽町)에서 환승해 아카사카(赤坂)로 출근하고, 퇴근할 때는 그 역순으로 인파에 밀려가는 루틴의 연속이다. 그런 일상이 지나고 주말이 되면, 마음속 버튼을 '여행자 모드'로 켜고 뭔가 새로운 경험을 찾아 나선다.


나의 주된 목표는 유튜브나 블로그에 소개된 유명한 가게를 찾아가는 것이다. 흥미로운 가게를 발견하면, 우선 타베로그(食べログ, Tabelog)에서 평점을 확인한다. 타베로그는 일본의 대표적인 레스토랑 가이드로, 모든 유저 평가의 평균을 내는 구글과 달리, 활동이 많은 미식가(グルメ, Gurume)들의 평가에 가중치를 두는 알고리즘을 사용한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는 구글 평점보다 신뢰가 간다.


타베로그 평점 3.5 이상이면 소문난 맛집, 3.7 이상이면 그 지역의 최상위 맛집, 그리고 4.0 이상이면 '인생에 한 번은 가봐야 할' 전국구 맛집으로 통한다. 나는 대체로 3.5점 내외의 가게를 고른다. 3.7 이상은 1인당 1만 엔을 훌쩍 넘는 곳이 많고, 4.0 이상은 3만 엔이 넘는 곳이 대부분이다. 여기에 음료(飲み物, 노미모노)까지 주문하면 특별한 날도 아닌데 한 끼 식사로 꽤 부담스럽다. 그래서 1인당 2,000엔에서 3,000엔 내외의 예산으로 평점 3.5 근처의 가게들을 공략하는 것이 나만의 방식이다.


하라주쿠(原宿)의 '로스트비프 오노(ローストビーフ大野)' (평점 3.49점), 신주쿠(新宿)의 '쇼군 버거(ショーグンバーガー)' (평점 3.69점), 다이칸야마(代官山)의 '고항야 잇신(ごはんや一芯)' (평점 3.61점), 시부야(渋谷)의 라멘 맛집 '하야시(らーめん はやし)' (평점 3.77점) 같은 곳들이 그렇게 찾아간 곳들이다.

KakaoTalk_20251001_143302251.jpg 신주쿠 쇼군버거


그런데 이곳들의 공통점은 예약이 안 된다는 것이다. 무조건 줄을 서야 한다. 11시 30분에 문을 연다면, 적어도 1시간에서 30분 전에는 도착해야 첫 타임에 들어갈 수 있다. 조금만 늦어도 다음 차례로 밀려나 30분 이상을 추가로 기다려야 한다.


예전에는 긴 기다림 끝에 맛집에 입성하면 "아, 역시 유명한 이유가 있네"하며 만족감이 급상승했지만, 상상 이상으로 덥고 습한 도쿄의 여름에 줄을 서다 보면 짜증 게이지가 한없이 올라간다. 한번은 식당 유리문 안에서 식사를 다 마친 두 사람이 오차(お茶) 한 잔을 앞에 두고 하염없이 수다를 떠는 모습을 밖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순간 뛰어 들어가 "쿠키오 요메!(空気を読め!)", 즉 '분위기 파악 좀 하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숨을 쉬고 뒤를 돌아보니, 내 뒤에 서 있던 모두가 나와 같은 표정으로 그 두 사람을 보고 있어서 뿜을 뻔했다. 그렇게 애태우다 들어간 가게에서 음식 첫 입을 베어 물면, 대부분의 분노 게이지는 눈 녹듯 사라지곤 했다.


점심을 먹고 나면 다시 거리의 인파 속으로 섞여 들어 정처 없이 밀려다닌다. 시부야에 갔다면 파르코(PARCO) 백화점을 중심으로 '휴먼 메이드(HUMAN MADE)', '베이프(BAPE)', '슈프림(Supreme)'을 둘러보고 가끔은 '스투시(Stüssy)'에 들른다. 하라주쿠라면 'PAP.COFFEE'에 가서 딸기 크렘 브륄레 빙수를 먹거나, '아임 도넛?(I'm donut?)' 앞에서 20분쯤 기다려 도넛을 맛본 뒤 '아식스(ASICS)', '뉴발란스(New Balance)'와 신발 편집숍 '아트모스(atmos)'를 한 바퀴 돈다. 신주쿠에서는 이세탄(伊勢丹) 백화점 지하 식품관을 구경하고, 근처 '빔즈 재팬(BEAMS JAPAN)'에 가서 기발한 생활 잡화들을 탐방한다.


도쿄 생활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주말의 '여행자 모드'는 꽤 재미있었다. 하지만 50번이 넘는 주말이 지나자, 도쿄 탐방도 그저 일상이 되어 갔다. 수육과 겉절이를 곁들인 연희동 칼국수, 동네 가게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순댓국, 필동면옥의 슴슴한 냉면 같은 것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약간의 향수병과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 반복되고,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연달아 터지면서 몸과 마음이 임계점에 도달해 버린 어느 날 아침. 출근길 전철 선반 위 광고 포스터에 적힌 두 글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닛코(日光)


'저길 가보자.'


2.


닛코(日光)는 자연과 역사가 공존하는 곳이다.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닛코를 보기 전에는 훌륭하다(結構, 겟코)라고 말하지 말라(日光を見ずして結構と言うな)”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한 곳이다. 도쿄에서의 일상이 지겹고 지칠 때 떠나는 닛코 여행이라 설렘으로 출발했으나, 처음 가는 길이라 마음을 놓고 시간에 따라 흘러가기에는 이래저래 신경 쓰이는 게 너무 많았다.


도쿄에서 닛코로 바로 가기 위해서는 도부 철도(東武鉄道)를 이용해야 하는데, 인터넷 예매를 통해 편도 1인당 1,650엔가량의 열차표를 왕복으로 구매했다. 그런데 구입 후 받은 메일에는 QR코드도, 실물 티켓으로 교환하라는 안내도 없이 그저 입장 시 구매 내역서를 보여주면 된다고만 적혀 있어 조금 당황스러웠다. 출발역인 기타센주역(北千住駅)에 도착해 열차 타는 곳을 찾아보니 일반 전철과 같은 입구를 사용했다. 역무원은 스이카(Suica)를 찍고 들어가라고 안내했다. '그럼 이건 요금이 0원으로 처리되나?' 살짝 고민이 되었지만, 일단 개찰구를 통과해 도부 열차 플랫폼에서 구매내역서를 보여주고 열차에 올랐다.


한 시간 사십 분가량을 달려 도부닛코역(東武日光駅)에 도착해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개찰구에 스이카를 찍고 나오니 1,400엔가량이 차감된 것이다. 역무원에게 물어보고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인터넷에서 구매한 1,650엔짜리 티켓은 순수한 '좌석권(特急券)'이었고, 기본 운임(乗車券)은 스이카로 별도 지불하는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결국 편도 교통비는 약 3,000엔이었다.


도착하자마자 편하게 돌아다니려고 캐리어를 호텔까지 보내는 탁송 서비스를 이용하는데 1,700엔, 도쇼구(日光東照宮)와 신쿄(神橋)를 보기 위해 버스로 10분 이동하는 데 400엔, 다시 해발 1,200미터가 넘는 게곤 폭포(華厳の滝)까지 꼬불꼬불한 산길을 40분 오르니 1,000엔, 그리고 유노호(湯ノ湖) 근처 오쿠닛코(奥日光)의 호텔로 30분 이동하는 데 또 1,000엔이 들었다. 아침에 핫초보리(八丁堀)에서 기타센주까지 들었던 전철 요금까지 합치니 하루 교통비로만 1인당 6,000엔을 넘게 쓴 셈이다. 일본인들이 여행할 때 입버릇처럼 “가네, 가네, 가네(金, 金, 金)” 하는 이유를 실감했지만, 서울에서 자가용으로 다닐 때의 기름값과 비교하면 어디가 더 비싼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도쇼구(日光東照宮)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위패가 모셔진 신사다. 일본의 다른 신사들에 비해 규모도 크고 무척 화려했다. 사진에서 본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아마 한국인이기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어떤 인물인지 알지만, 마음에 와닿는 인물은 아니기에 신사를 봐도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는 없었던 것 같다.


다음으로 향한 게곤 폭포(華厳の滝)는 일본 3대 폭포 중 하나로 높이가 97미터에 달한다. 주차장 입구에서 엘리베이터로 100미터를 내려가면 3층 규모의 관람대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본 물줄기는 실로 장쾌했다. 사진 몇 장을 찍고 나니, 유튜브 영상으로 보는 것 이상의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관람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 군밤 노점상에서 1,200엔을 주고 산 군밤 한 봉지가 이번 여행의 '발견'이었다. 한국 군밤보다 알이 굵고 수분감이 많아 퍽퍽하지 않고 훨씬 달았다. 나만의 기준으로 평점 3.5점은 줄 만했다.


호텔의 유황 온천은 특유의 냄새가 있긴 했지만, 물의 감촉은 포근하고 미끈거리지 않아서 좋았다. 하지만 저녁 뷔페는 평범했고, 도쿄의 공기도 나쁘지 않아서인지 해발 1,400미터 고지대의 공기가 특별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이튿날, 주젠지 호수(中禅寺湖)로 가서 유람선을 탔다. 2만 년 전 난타이산(男体山)의 분화로 생겼다는 해발 1,269미터의 거대한 칼데라 호수. 유람선으로 호수를 한 바퀴 도는 데는 약 50분이 걸리고, 중간에 선착장 세 곳에 정차한다. 이 중 한 곳, 과거 영국대사관(英国大使館)과 이탈리아대사관(イタリア大使館)의 여름 별장이 있던 한적한 곳에 내린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영국대사관 별장 기념공원 2층, 전면이 탁 트인 라운지 카페에 앉아 잉글리시 블랙퍼스트 티와 함께 바라보는 주젠지 호수. 그 순간 시간도 멈추고 마음의 번뇌도 일순 사라졌다. 비싼 돈을 썼으니 무언가 보고 즐겨야 한다는 여행에서의 강박마저 깨끗이 잊게 만드는 풍경이었다. 도쿄의 번잡함과는 다른, 어떤 계산도 필요 없는 곳이었다. 우연히 이곳에 내려 돌아가는 배를 한 번 놓쳤음에도 시간이 아깝다는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만약 이곳에 들르지 않았다면, 이번 여행은 그저 '닛코에 다녀왔다'는 사실 이상의 의미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KakaoTalk_20251001_143420560.jpg 주젠지 영국 대사관 휴양지 선착장


닛코는 7~8월의 짙은 녹음 속에서 도쿄보다 4~5도 낮은 여름 휴양지이고, 10월 중하순에는 단풍이 절정에 달해 자연의 아름다움이 최고조에 달한다고 한다. 그 기간을 피해 9월에 여행했으니, 참 어정쩡한 시기에 간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국대사관 별장을 만날 수 있었기에, 닛코는 내 기억의 창에서 “시간이 멈춘 호숫가의 오후”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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