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uture id in the past" T샤츠 하나
9월 26일, 시부야(渋谷) 파르코(Parco)의 휴먼메이드(Human Made) 매장이 재개장을 했다. 기존의 자그마한 매장은 의류를 취급하는 PART 1으로 리모델링했고, 같은 건물 대로변에는 가방과 모자 등 액세서리 중심의 PART 2 매장을 새로 열었다.
이 브랜드를 알게 된 것은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23년 여름, 도쿄(東京) 출장길에 아들이 휴먼메이드 모자를 사달라고 부탁했었다. 하라주쿠(原宿) 근방의 오프라인 매장에 들를 시간이 없어 고민하던 중, 시부야 파르코 1층에서 작은 숍을 발견하고는 로고가 크게 들어간 모자를 얼른 구입했다.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조각가 프랑수아 퐁퐁(François Pompon)의 <백곰(Ursus blanc)>을 닮은 동물이 그려진 모자도 있었지만, 고등학생 아들이 쓰기엔 너무 유아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에 동물이 그려진 모자가 훨씬 인기가 많아 리셀가가 높다는 아들의 핀잔을 들어야 했다.
비슷한 경험은 그전에도 있었다. 코로나 이전에 아들과 도쿄 여행을 왔을 때, 아들은 베이프(A Bathing Ape, BAPE)의 샤크 후드를 원했다. 오모테산도(表参道) 뒷골목, 주택을 개조한 숍들이 늘어선 곳 한가운데에 통유리로 지어진 3층짜리 베이프 건물이 있었다. 디스플레이된 옷을 보며 ‘이건 아이들이나 입는 옷’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물론 후드의 지퍼를 끝까지 올리면 나타나는 상어 얼굴은 참 기발하다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베이프의 상징이 클라우드 카모 디자인이라는 것도, 그 안에 유인원(APE) 얼굴이 숨어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아이들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 중 하나라고만 여겼다. 게다가 스웨트셔츠(맨투맨)가 3만 엔, 후드집업이 5만 엔 내외였으니 당시 환율로 30만 원, 50만 원을 훌쩍 넘는 가격이었다. 학생 옷에 50만 원이라니. 내 상식의 저항선은 꽤나 견고했다.
휴먼메이드는 하라주쿠 근처에 블루보틀(Blue Bottle Coffee)과 협업한 ‘휴먼메이드 카페’라는 오프라인 매장이 있다. 하라주쿠와는 조금 떨어져 있어, 츠키시마(月島)에 있는 우리 집에서 가려면 요요기(代々木) 역에서 버스를 타거나, 하라주쿠에서 15분은 족히 걸어야 하는 애매한 위치다. 작년에 도쿄에 살게 되면서 이 브랜드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더 알게 된 후에야 이곳을 찾았다. 베이프를 만들었던 디자이너 니고(Nigo)가 브랜드를 매각하고 새로 만들었다는 것, 전 세계적으로 인기가 급등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신제품은 늘 토요일 오전 11시에 공개되어 당일 대부분 품절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어느 가을 토요일 아침, 난생처음 ‘오픈런’을 위해 11시보다 이른 10시 반을 목표로 하라주쿠 매장으로 향했다. 오픈 30분 전이었는데도 매장 안 대기 구역은 이미 네 줄로 가득 차 있었고, 내 순번은 100번을 훌쩍 넘어 보였다.
매장은 판매 구역과 대기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원형 유리 진열대에는 모자, 액세서리, 블루보틀 협업 굿즈가 있었고 한쪽 벽면에 스무 종류가 채 안 되는 옷들이 걸려 있었다. 대기하며 블루보틀 아이스 라테를 마셨지만, 판매 구역에 들어서기까지는 족히 한 시간이 걸릴 듯했다.
목표는 아들의 모자와 후드였는데, 한참을 기다리다 보니 티셔츠 등에 새겨진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옷에 쓰인 문구라고는 브랜드 이름이나 ‘Just Do It’ 정도가 전부였던 내게, 등판을 가득 채운 “The future is in the past”라는 문장은 낯설게 다가왔다. 과거를 통해 미래를 이해하라는 뜻일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게 미덕이라 배워왔는데, 내 미래를 보려면 과거를 돌아보라고 등에 써 붙이고 다니라는 말인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문구는 단순히 멋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세계적인 빈티지 의류 수집가인 창립자 니고가 자신의 방대한 아카이브(Past)를 교과서 삼아, 현대적인 감각으로 새로운 옷(Future)을 만들어낸다는 브랜드의 심장과도 같은 철학이었다. 과거의 진정성을 통해 시간을 초월하는 가치를 만든다는 이야기는 꽤 근사하게 들렸다.
나는 평생 옷이란 지위를 보여주고, 활동하기 편하며, 개성을 드러내는 수단이면 족하다고 여겼다. 실제로는 한두 브랜드의 점잖고 질 좋은, 내 판단으론 디자인이 괜찮은 옷들만 소비했다. 색깔도 블랙이나 그레이 계열의 무채색, 큰맘 먹고 도전해야 파스텔 톤의 로고 없는 옷이 전부였다.
그런데 “The future is in the past”라는 문구에 갑자기 꽂혀버렸고, 블루 계열의 박시한 티셔츠 한 장과 파스텔 핑크색 모자를 구입했다. 내 옷장에 처음으로 ‘이야기’가 담긴 옷이 걸리는 순간이었다. 나의 과거가 도쿄에서의 이런 변화를 품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마음이 끌렸다.
휴먼메이드에 오픈런을 시작한 지 1년이 되어간다. 그사이 서울 성수동에 한국 매장이 생겼고, 여전히 도쿄를 찾는 지인들의 자녀를 위한 선물 가게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내 느낌일까, 인기가 예전만 못한 것 같다. 올해 메인 캐릭터인 오리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탓도 있겠지만, 예전에는 토요일에 신제품이 공개되면 당일 오후에 대부분 품절되던 것이 요즘은 신작 대여섯 개 중 한두 개만 솔드아웃이다. 몇 주 전 신작이 여전히 매장에 걸려 있는 모습도 종종 보인다.
9월 26일 시부야 파르코 매장이 리뉴얼을 한다고 해서 아침 9시에 오픈런을 했었다. 약간의 특별한 프레젠트나 이곳만의 별주 디자인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매장을 두 개로 늘렸지만, 여전히 자투리 공간을 활용한 탓에 의류 매장(PART 1)은 고객 서너 명만 들어가도 직원들과 뒤섞여 꽉 차 버렸다. 옷을 입어보고 결정하기엔 너무 어이없는 공간이었다. 액세서리 매장(PART 2) 역시 제품을 만져보기도 힘든 구조로 진열된 것을 가르켜서 주문하거나, 자신의 폰 사진을 보고 제품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하는 식이었다. 또 좁은 매장 탓에 바깥의 고객들은 언제 들어갈지 모른 채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고, 기대했던 특별 선물이나 별주 디자인은 없었다.
이런 공급자 위주의 판매 전략을 보며 다시금 생각한다. 인기는 영원하지 않다. 소비자는 욕망이 있는 한 계속 지갑을 연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지불하는 비용과 그로부터 얻는 만족의 크기가 불일치한다고 느끼는 순간, 그 많던 팬들은 다음 유행을 향해 미련 없이 떠나버릴지도 모른다.
문득 유행의 흐름 속에서 휴먼메이드가 정점을 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는 K-POP 아티스트들이 일본 시장에서 겪는 과정과 비슷하다. 등장과 동시에 신드롬을 일으키며 아레나 투어를 돌고, 더 성장해 돔 투어로 수십만 관중을 모으는 월드 스타가 된다. 하지만 그 인기는 영원하지 않다. 몇 년 뒤 새로운 스타가 등장하면, 기존 스타들은 공연장 규모를 줄이며 이미 형성된 팬덤에 기대게 된다. 기업이 기술 혁신으로 위기를 돌파하듯, 아티스트에게는 세계관의 확장이나 새로운 매력을 보여줄 전기가 필요하다. 블랙핑크(BLACKPINK)는 이 전환을 성공적으로 해낸 듯하다.
물론 노화가 자연스러운 아티스트와 상품인 의류는 다를 수 있다. 에르메스(Hermès), 샤넬(Chanel)처럼 세대를 넘어 열망의 대상이 되는 명품이 있는가 하면, 서서히 잊히는 브랜드도 많다. 2010년에 탄생한 휴먼메이드. 과거를 통해 미래를 만든다는 이 멋진 브랜드가 어떤 미래를 맞이할지, 나는 그저 흥미로운 소비자로서 지켜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