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아카사카 1
1.
우리 회사가 아카사카에 자리 잡은 것은 밀레니엄이 시작되고 한류가 전 세계적으로 꿈틀대기 시작한 2005년이었다.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은 일본 내에서 한국 콘텐츠를 직접 송출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처럼 디지털이나 인터넷이 당연하지 않았던 당시, 생산된 콘텐츠가 해외로 나가려면 국내외 중개인을 통해 해당 지역 방송사의 결정을 받아야 하는 복잡한 구조를 거쳐야 했다. 여러 단계의 상업적인 판단과 정치적 고려를 거치다 보니 국내에서 만든 좋은 콘텐츠가 현지에 방송되기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이걸 단박에 줄일 방법은 현지에서 바로 송출해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었고, 그것이 콘텐츠의 부가가치를 일시에 높이는 길이라는 게 초창기 채널의 일본 진출을 검토하고 실행했던 분들의 생각이었다. 물론 지상파 형태는 인허가 문제와 상상할 수 없는 투자금이 필요하니, 케이블이나 위성 채널로 자리 잡는 것이 우선 과제였다. 시기적으로도 ‘겨울연가’가 일본 내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보아 같은 한국 가수가 오리콘 차트를 휘젓던 때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카사카에 자리를 잡았다. 방송 관련 업종이기에 근처에 큰 방송사 TBS가 있고, 광고 회사인 덴츠나 하쿠호도(博報堂)와도 가까우며, 주 거래처인 위성 사업자 스카이퍼펙트(SKY PerfecTV!)와도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표면적인, 이른바 ‘오모테(表)’의 이유이고, 진짜 속내인 ‘혼네(本音)’ 중 하나는 바로 아카사카에 한식당들이 많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도 성업 중인 ‘하모니’, ‘일용이네’, ‘청솔’ 등이 그 당시에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스시와 라멘이 아무리 익숙해도 관광이 아님 다음에 매일 일하면서 이것만 먹을 수 없으니, 한국에서 파견 나와서 일하는 사람들은 먹을 게 익숙한 동네에 자리 잡는 것이 당연했다고 생각된다.
한식당 외에도 아카사카의 밤을 채우는 또 다른 얼굴이 있었다. 일본에는 접대 술집 형태 중의 하나가 ‘쿠라브(クラブ)’인데, 도쿄의 긴자에는 일본인 마마가 일본인 접대부를 고용해서 영업을 하고 있었다면, 아카사카에는 ‘미즈와리(水割り)’라고 통칭되던 한국 접대부들의 한국 ‘쿠라브(クラブ)’들이 많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한식당과 한국 ‘쿠라브(クラブ)’, 이 두 업종이 아카사카 밤 문화의 큰 축으로 각인되었었다.
그즈음 도쿄 출장길에 회식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다 보면, 아카사카 상점가 길 양쪽으로 누가 봐도 한국인인 접대부들이 롱드레스를 입고, 조그마한 핸드백에서 ‘카멜’이나 ‘럭키 스트라이크’를 꺼내 피우는 모습을 쉬이 볼 수 있었다. 또한 택시 앞에서 손님을 배웅(送迎)하는 모습, 잔뜩 부풀린 ‘후카시(ふかし)’ 머리에 하이힐을 신고 나이 든 정장 차림 아저씨의 팔을 잡고 혼잡한 거리를 휘청대며 걸어가는 모습들도 자주 눈에 들어왔었다. 2000년대 초의 선명한 풍경이다.
밀레니엄 직전, 연말에 도쿄에서 열린 한국 가수의 콘서트를 취재 온 적이 있었다. 당시 한국 젊은 여성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던 신세대 가수였는데, 공연은 신주쿠 게이오 플라자 호텔에서 열린 디너 콘서트였다. 신나는 댄스곡을 부를 땐 소란스러워 괜찮았지만, 조용한 발라드를 부를 때면 여기저기서 스푼과 포크가 도자기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노래의 감흥을 계속해서 깨뜨렸다. 훗날 풍문으로 들으니, 그 디너쇼 관객의 상당수가 아카사카에서 일하던 한국인 여성들이었다고 했다.
당시 한국에서 도쿄로 오는 분들에게 아카사카는 신주쿠 오쿠보의 한인 타운만큼이나 익숙한 곳이었다. 지금 천만 한국인 관광객 시대에 필수 코스가 된 하라주쿠, 오모테산도, 시부야, 나카메구로, 다이칸야마 같은 곳들과는 전혀 다른 시대의 이야기다.
하여간 우리 회사는 이 시기, 아카사카 안쪽 거리 5초 메의 코반(交番, 파출소) 옆 건물 2층을 빌려 송출 시설, 편집실, 사무실을 만들며 채널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6년 만에 다시 같은 건물 5층을 빌려 스튜디오를 만들고, 한글 보급 등을 위한 한류센터를 열면서 본격적인 성장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2.
그렇게 10년의 성장을 구가하던 회사는, 이후 10년 동안 서서히 늙어가고 있었다.
그 사이 세상은 K-콘텐츠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드라마와 K-POP으로 시작된 한류는 BTS와 블랙핑크 같은 글로벌 스타를 탄생시켰고, ‘오징어 게임’은 전 세계적인 히트를 쳤다. K-Food, K-Beauty가 세상을 휩쓸었다. 하지만 아카사카의 우리 회사는 그 흐름을 비껴가고 있었다. 지은 지 60년이 넘어 내진 시설도 없는 건물에서, 지진 위험으로 송출 업무는 아웃소싱된 지 오래였다. 한때 붐볐던 한류센터는 수익 악화로 문을 닫았고, 스튜디오는 비용 절감을 위한 창고가 되었다. 넷플릭스와 유튜브의 시대에 어쩌면 당연한 노후화였지만, 일본 특유의 시장 덕에 우리는 급격히 가 아닌, 서서히 늙어갈 뿐이었다. 일본은 케이블이 모바일, 인터넷, 방송 등이 결합된 상품으로 변화에 느린 50대 이상의 가입자들을 붙잡고 있고, 법적으로 IPTV가 동시 생방송을 할 수 없어, 한국에 비해 (방송 부문의) 매출 하락이 완만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카사카에 부푼 가슴을 안고 출근했던 그 여름날, 늙어버린 공간과 성장이 멈춘 회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문제를 발견했을 때 사람마다 대응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여러 가능성을 따지고 꼼꼼히 검토하다 실행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일단 몸부터 움직여 부딪히며 수정해 나가는 사람이 있다. 후자에 가까운 나는 우선 “환경 개선”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단순하게 생각했다. 쓰레기를 치우고 MZ세대들을 위해 파티션을 설치하면 좋은 회사의 기초공사는 될 것이라고. 직원들의 의견을 제대로 묻지도 않고 나의 직관을 믿고 추진해 버렸다.
하지만 현지 직원을 통한 보고 내용은 답답했다. 폐기물 정리에 업자를 선정하고 협의하는 데 두 달, 파티션 설치는 견적에만 한 달, 공사에 두 달이 걸려 여름에 기획한 일이 초겨울에나 끝날 판이었다. 그러면서 일본의 일 처리가 느려 한국에서 온 사람들은 적응이 잘 안 될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결정적으로 기획사(중간 관리 회사)를 통해 받은 견적서는 한 개 층 68평 공간의 파티션과 회선 공사에 450만 엔(약 4,500만 원)을 요구했다. 결국 나는 ‘한국식’으로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중간 기획사를 거치지 않고 파티션 판매 회사를 직접 찾아가 설치 기사 출장 비용을 더해서 주고, 회선 공사도 전기, 전화, 인터넷 공사 업체를 직접 섭외했다. 10월이 오기 전에, 절반의 비용으로 모든 것을 마무리했다.
그런데 파티션이 마무리될 무렵 우연히 창가를 보니, 20년 된 블라인드에 끼어 있는 시꺼먼 연륜의 먼지들은 직원들의 자발적인 청소로도 제거가 안 되었다. 하는 수 없이 교체…. 그러자 이번엔 화장실 벽면과 내 책상 뒷면에 가로로 선명히 보이는 균열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 놀라 건물주에게 수리를 요청했더니 구조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답변이 돌아왔고, 몇 번의 문의와 내용증명을 보낸 후에야 보기에도 심한 화장실 부분만 수리비를 반반씩 부담하는 것으로 합의를 했다. 70만 엔 지불. 게다가 20년 된 카펫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올라와 오염된 부분을 상당수 교체했음에도 여전했고, 건물주가 제공한 에어컨은 소음이 너무 심했다. 오래된 건물의 홑겹 창문은 소음 차단은 물론 온도 조절도 불가능했고, 방충망이 없어 여름엔 창문을 열어두니 새 한 마리가 날아 들어온 적도 있었다고 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이 건물은 내진 시설이 없었다.
옮겨야만 했다. 비싼 임대료, 직원들의 안전 문제, 그리고 이 건물에 더는 돈을 쓰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여기에 예상치 못한 문제도 있었다. 좁은 공간에 오밀조밀 모여 있을 땐 좋았던 직원들 사이가, 넓은 공간에 파티션이 생기자 오히려 서먹해지며 대화가 단절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름에 시작했던 일을 서둘러 가을에 마쳤는데, 그해 겨울 나는 이사를 결심했다.
그렇다고 이사는 간단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