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말고 일본]
하코다테에서 떠올린 노래 둘

- 계획대로 되지 않았던 여행에 의미를 더하다

by 하임

생각대로, 계획대로 하나도 되지 않았던 하코다테에서 여행에 대한 의욕이 사라지자 오히려 시간이 무지하게 남았다. 여행을 오기 전부터 다가올 시간들에 대한 강박 때문이었는지, 밤에는 토막잠을 반복했다. 자다 깨다를 되풀이하며 남은 건, 내가 너무 고심하고 있다는 감각뿐이었다. 사실 조금 지쳐 있었다.


둘째 날 새벽도 순탄하지 않았다. 꿈인지 악몽인지 알 수 없는 장면들 사이에서 결론을 보려다 결국 새벽 다섯 시쯤 눈을 떴다. 하는 수 없이 1930년대 영화 세트장 같은 호텔 로비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셨다. 불면이 심해진 날이면 대개 다시 잠들기 마련인데, 그날은 생각이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나와의 대화’, 그리고 ‘지나간 나와의 이별’ 쪽으로.

눈내리는 하코다케 베이.jpg 새벽 눈 내리는 하코다케 베이


<겨울 바다 떠나는 그대에게>


눈 내리는 겨울 바다 파랗게 얼어붙을 때

붉은 창고 지붕 위로 하얀 추억들이 쌓여간다

새벽 눈길의 까만 점으로 점점 사라지는 나는

짙은 커피 한 모금에 각성된 기억으로 되돌아온다


빛바랜 탁자 위로 세상이 소리 없이 밝아와도

붉은 신호등만 고요한 아침을 지키는 거리

눈 내려 구름과 산의 경계가 사라진 저 너머로

나에게서 나를 끄집어내어 기어이 밀어버려야 한다


기억할 순 없어도 머물 수 없다

예고 없던 폭설이 도시를 하얗게 지워가듯

내 기억 속의 나를

그날이 오면 만나지 않았던 사람처럼 잊어내야 한다


내 기억 속의 나는 따스한 행복이었다

이별은 나를 다시 처음의 자리로 돌려놓겠지만

그즈음의 나는 언제나 어제처럼 내 마음에 남아 있으리니

그렇게 나는, 나를 보낸다.



돌아오는 셋째 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밤새 잠을 설친 채 스타벅스에 앉아 있었다. 일기 예보는 맑음이었지만, 창밖으로는 아침부터 바닷바람을 타고 폭설이 몰아쳤다. 여행객들로 붐벼야 할 거리는 바람 부딪치는 소리와 카페 안의 음악 소리로만 채워졌다. 그리고 또다시, 나는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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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코다케 베의 거리의 <스타벅스>


<스타벅스 창가에서 인생을 본다>


하늘엔 구름이 흐르고

햇빛은 그 틈으로 잠시 눈부시다 사라진다

땅에는 아침부터 눈이 내려

여행자들은 재잘대며 언 땅을 조심스레 딛고 지나간다

마음엔 먹구름이 떡하니 멈춰 섰다

희망은 헛꿈에서 깬 아침처럼 할 말이 없고

얼굴은 근심에 녹아 흘러내렸는데

기억들은 좋은 순간만 추려내려 애쓰고 있다


겨울 바다 등진 커피숍 2층 1인용 소파

통창 앞에 앉아 아이스티를 녹여 두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 앞으로는 어쩔 거냐며

나를 내 앞에 앉혀 놓고 조용히 따져 묻는다

내가 답이 없는데 나의 나인들 답이 있겠나

지난날들을 순례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순간순간 이어 온 경험과 직관들이

알고 보니 겨울 바다에 내리는 폭설이더라


그래도 겨울 끝자락 내일을 만나서 다행이다

동백꽃 목 꺾이고 매화 서둘러 필 즈음

내가 서 있는 배경으로 개나리와 벚꽃 피고

내가 걸어가는 길 양옆으로 플라타너스 새 잎 터뜨리길 기대한다


이게 희망이지

겨울 한가운데서 초여름을 본다



여행을 마치면서 하코다테가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는 시간이 더 지나야 알 것 같다. 오징어, 야경, 온천 원숭이, 아카렌가 같은 관광지로 기억될지, 아니면 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힐링의 순간으로 남을지는 더 살아봐야 알 일이다.

하지만 계획대로, 생각대로 되지 않아 나를 열받게 했던(Heating) 2박 3일이, 역설적으로 내게 치유(Healing)가 되는 인생의 시간을 주었다면, 앞서 겪은 모든 엇박자들은 어차피 인생에서 다 잊힐 일들이다. 그렇게, 이번 하코다테 여행의 의미를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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