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미지(紅葉)의 기억
우연히 핸드폰 사진을 뒤적이다 2025년 12월 교토(京都) 사진을 보았다. 참 표현 그대로 '알록달록'했다.
교토는 작년(2025년) 4월에 첫 방문을 했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20년도 더 되었는데, 당시 패키지여행을 와서 기요미즈데라(清水寺, 청수사)와 킨카쿠지(金閣寺, 금각사)를 들렀던 기억이 있다. 나의 아날로그 사진첩에는 진짜 금일까 아직도 의심이 가는 금각사와, 나무로 기둥을 쌓아서 5층 높이의 나무 바닥을 만들고 그 위에 본당을 지은 청수사 등을 배경으로 찍은 현상 사진이 아직 곱게 모셔져 있다.
-기요미즈데라 (清水寺) https://www.kiyomizudera.or.jp
-킨카쿠지 (金閣寺) https://www.shokoku-ji.jp/kinkakuji
지금은 상상도 못 할 패키지였는데, 대략 서울에서 니가타(新潟) 공항으로 날아와서는 닛코(日光)로 이동해서 1박, 도쿄(東京)에서 1박, 하코네(箱根) 들러 시즈오카(静岡) 인근에서 1박, 오사카(大阪), 교토(京都), 나라(奈良) 찍고 그 근처에서 1박, 그리고 오사카에서 한참 남쪽으로 내려갔었는데 어딘지 모르겠지만 야자수가 보이는 어떤 바닷가 호텔에서 1박 등등... 5박 6일의 '전 일본 일주'라는 여행 상품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밥 먹자마자 관광지에서 사진 찍고 출발하고, 고속도로 인근에서 대략 점심 먹고 오후 4시 정도에 관광지에 도착해서 사진 찍고, 그리고 밥 먹고 숙소에서 바로 잠자는... 글쎄 패키지로는 사진 남는 걸로는 최고였지만 하루에 5~6시간 버스를 타야 하는 게 정말 고역인 투어였다. 지금 여행 패턴으로는 성립 안 하는 패키지였지만 일본 혼슈(本州)의 주요 관광 포스트의 사진이 다 남아 있는 여행이었으니 정말 대단한 행군이었다.
그러니까 20년 전에 한 번 스쳐 갔는데, 존경하는 선배님 한 분이 한동안 걸어 다니면서 요기조기 보는 맛이 알뜰살뜰하다고 일 년에도 몇 번씩 여행을 다녀오셨다. 봄에는 봄, 가을 하면 가을, 겨울에도 겨울 등등 교토 특유의 계절의 맛이 잊히지 않아서 일본 여행은 교토만 한다고 했었다. 참, 여름 교토는 분지라서 무지 덥다고 한다. 대학교 시절에 같이 하숙집을 썼던 대구 선배가 서울에만 와도 피서 온 거 같다고 했던 기억이 났는데, 대구도 분지 지형이라 같은 모양이다.
보통 간사이(関西) 지방을 여행하는 분들은 오사카에 숙소를 정하고 하루 정도 시간을 내어 교토를 방문한다. 4월에 교토 여행을 한 다음부터는 다른 분들에게 교토에 숙소를 정하고 오사카를 당일치기로 가서 도톤보리(道頓堀)에서 사진 찍는 정도가 더 좋을 거라고 조언하고 싶어졌다.
우선 교토는 인구 145만의 제법 큰 도시이고, 우리가 잘 아는 교세라(Kyocera), 닌텐도(Nintendo), 시마즈 제작소(Shimadzu, 島津製作所) 등 세계적인 기업의 본사가 있는 곳이고, 인구당 대학생 비율이 일본에서 가장 높은 지역이다. 즉 젊고 기본적인 경제 구조가 갖추어진 도시이다. 그 위에 일본 역사에서 1,000년 동안, 메이지 유신으로 수도를 도쿄(東京)로 옮긴 1869년까지 일본의 수도로 행세하던 도시이다. 그러다 보니 흔히 우리나라의 경주와 비교되기도 하지만 사실 기반이 서로 다른 도시이다. 경주는 훌륭한 문화 도시이지만 산업적인 기반은 없는 도시이다. 교토는 천 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외관에다 안으로는 관광만이 아닌 자체 경제 인구 등 자체 인프라로도 성장이 가능할 수 있는 도시이다. 쇼핑으로 보자면 KAPITAL이나 이세이 미야케(Issey Miyake) 같은 요즘 핫한 브랜드들이 역사를 머금은 2층 목조 건물을 로드 샵으로 쓰고 있다. 이질적인 것들이 빚어내는 절묘한 조화를 느끼게 한다.
4월에 처음 방문한 교토는 산넨자카(三年坂), 니넨자카(二年坂) 등 관광지와 연결된 잘 조성된 관광 거리가 아니더라도 시내 한가운데의 길거리를 걷는 것만으로 사극 세트장을 걷고 있는 느낌을 준다. 굳이 기온(祇園) 거리를 가서 일본 문화의 한 자락인 게이샤나 마이코를 찾아보지 않더라도, 니시키 시장(錦市場)이나 시조(四条) 거리 등을 걷는 것만으로 과거와 연결된 현재를 볼 수 있다. 고베(神戸)로부터 가져온 커피나 베이커리로 요즘 감각을 더해 한국의 젊은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교토는 일본 다른 지역과 달리 불교 사찰이 많은 곳이다. 교토의 역사가 사찰과 승려와 함께했었고,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권력 쟁탈전 내내 싸웠던 게 사찰의 승려 세력이었고 본인 마지막을 장식한 곳도 혼노지(本能寺)라는 사찰이었으니 교토 역사에서 사찰이 발전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청수사, 금각사, 은각사(銀閣寺) 등 교토 시내의 사찰들도 한나절 물끄러미 앉아 시간을 멈추고 생각을 씻어 내기 좋은 곳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대나무 숲으로 유명한 아라시야마(嵐山)의 풍경과 이 안에 살짝 들어앉아 있는 텐류지(天龍寺, 천룡사)의 정원은 정말 압권이다. 텐류지 정원을 마주 보는 법당 처마 밑에는 언제나 많은 관광객들이 연못와 함께 꾸며져 있는 정원을 넋 놓고 바라보는 모습을 늘 볼 수 있다. 그들이 여행의 피곤함을 달래는지 일상에서의 고통을 내려놓는지는 그 속을 들어가 보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나로서는 그냥 거기에 앉아 있다는 거 자체가 좋았다.
-텐류지 (天龍寺) https://www.tenryuji.com
-아라시야마(嵐山) https://www.arashiyamahoshokai.com
게다가 저녁 식사로 예약했던 하치다이메 기헤이(八代目儀兵衛)에서의 식사는 교토가 왜 품격 있는 요리의 고향인지를 잘 보여준다. 쌀로 빚은 식전주로 시작해서 밥을 해 나가는 과정의 부산물들을 요리와 함께 제공해 주는 쌀밥 코스는 요리와 퍼포먼스의 연결, 즉 식사라는 원초적인 욕구의 충족과 예술적 퍼포먼스의 결합을 잘 보여준다. 도쿄에서는 이런 느낌을 커피 오마카세로 유명한 '커피 마메야 카게루(KOFFEE MAMEYA Kakeru)'라는 카페에서 받았었다. 저녁 코스의 가격대로는 10만 원 초반이니 그렇게 높다고 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낮지는 않다. 하지만 2시간 동안 밥이 지어지는 과정을 코스 요리로 즐기는 비용으로는 그리 높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치다이메 기헤이 http://www.hachidaime.co.jp
-커피 마메야 카게루 https://koffee-mameya.com
4월의 교토 방문이 너무 만족스러워서 다음 봄을 기약하려고 했는데 여행이 끝나갈 무렵 교토가 가을 단풍 역시 성지라는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사진으로 확인하고 나니 가을 교토가 어떤 모습일까 너무 궁금해졌다. 마침 기간도 11월 말에서 12월 초라 잘하면 맞출 수 있을 거 같았다.
드디어 12월이 오고 4월에 한 번 와 보았기 때문에, 별다른 계획 없이 호텔을 시내인 시조(四条) 근처로 잡고, 도쿄에서 신칸센 2시간에 늦가을의 교토를 다시 방문했다. 4월에 좋았던 아라시야마나 청수사 정도 돌고 이번에는 니시키 시장 근처에서 놀 계획이었다. 그런데 호텔로 가는 택시에서 아주 친절하고 수다스러운 기사분이 내가 전혀 모르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가을에 단풍을 제대로 보려면 에이칸도(永観堂), 난젠지(南禅寺), 도후쿠지(東福寺), 기요미즈데라(清水寺)를 가라고 추천해 주었다. 운전하면서 내가 잘 못 알아들으니까 잠시 멈춰 설 때마다 포스트잇에 모미지 추천 장소들까지 감사하게도 메모해 주었다. 이게 1년에 외국 관광객이 1,000만 명이나 방문하는 교토의 인적 인프라 포스인 거 같았다.
그래서 원래 계획을 백지화하고 일단 4곳을 중심으로 2박 3일의 일정을 채우기로 했었다. 우선 에이칸도(永観堂)는 정말 가을을 위해 태어난 정원이었다. 비시즌에는 1,000엔을 받지만 가을에만 2,000엔의 입장료를 받는 이곳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어 그냥 사진으로 남긴다.
그리고 밤에 기요미즈데라(清水寺)를 갔는데 야간 단풍의 백미라는 표현이 맞을 거 같다. 달빛과 가로등과 단풍이 어우러져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것 같은 기요미즈데라의 법당은, 맞은편에 역시 나무 기둥으로 쌓아 올려 기초를 잡아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나무 바닥(기요미즈의 무대) 위에서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맨 앞 열에 가야 제대로 된 사진을 찍을 수 있어 많은 사람이 몰린 가운데 약간의 눈치 게임과 과감하게 돌진해야 하는 용기가 필요한 시간이다. 다행히 15분 만에 맨 앞줄로 가서 얼른 사진을 찍었다. 돌아와 보니 내가 찍은 사진 가운데 가장 화려한 가을 사진 샷이었다.
그다음 날 아라시야마(嵐山)를 갔는데 사람도 많고 이미 봄에 가열차게 한 바퀴 돈 지역이라 인력거에 의존해서 스쳐 지나갔다. 사실 두 번 보니 감동의 3분의 1로 줄었고, 도게츠교(渡月橋)에서 사진 찍기도 어렵고 사람이 너무 많아 커피 한 잔 마실 곳이 없었다. 얼른 시내로 복귀해서 난젠지(南禅寺)를 갔었는데, 여기는 교토 여행을 하면서 갔던 곳 중에 유일하게 입장료를 받지 않았던 곳이고 교토 동쪽 히가시야마(東山) 산자락에 위치한 정말 규모가 큰 절이었다. 이곳의 건물들은 큼직큼직한 매력이 있었다.
마지막 날 아침에 도후쿠지(東福寺)로 갔었다. 이곳은 교토 남쪽 외곽 지역이라 사실 별 기대는 안 했었다. 그런데 아침에 9시 반 정도에 갔었는데, 정말 많은 분들이 관광버스나 전차 등을 타고 개미들의 행진처럼 도후쿠지로 가고 있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사진 하나 찍지 못했을 거 같다.
- 에이칸도(永観堂) http://www.eikando.or.jp
- 난젠지 (南禅寺) https://nanzenji.or.jp
- 도후쿠지(東福寺) https://www.tofukuji.jp
사실 지금도 지난 12월 초 교토의 사진을 보면 내 일생에서 봐야 할 단풍은 다 본 거 같다. 도쿄에 처음 왔을 때는 벚꽃 피는 4월의 하나미(花見)를 정말 크게 기대했었는데, 보고 나니 여의도 벚꽃길이나 도림천이나 양재천 벚꽃길도 일본 어느 지역에 못지않기에 봄꽃 구경으로는 1 티어라 굳이 일본을 올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12월 초에 일본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교토를 권하고 싶다.
한국에 있는 동안 내내 가을이면 내장산의 단풍 여행을 별렀는데 결국 한 번도 못 갔었다. 재작년 일본에 왔을 때도 가을 단풍 여행을 산이 좋은 동북 지역으로 가려했었는데 막상 가려니까 너무 긴 시간 이동해야 해서 포기해 버렸었다. 그런데 교토는 도심을 둘러싸고 있는 산자락 곳곳이 단풍의 명소였다. 시내버스를 타고 조금만 걸으면 내 눈에 단풍이 한가득 들어왔다. 회색이나 검은색으로 우울했던 내 가슴속이 한순간 컬러 TV가 된 듯했었다.
일본은 2025년 한 해에만 3,500만 명이 넘는 외국인이 관광을 오고, 그중 절반 가까운 숫자가 도쿄를, 1,000만 명이 넘는 외국인이 교토를 방문한다고 한다. 물론 중복 계산된 수치겠지만 엄청난 숫자다. 수도권 포함 3,000만 명이 넘게 사는 도쿄와 인구 145만 명의 교토를 비교하면, 도시 규모 대비 교토가 받아내는 관광객의 밀도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교토가 내국인 관광객까지 합치면 체감 밀도는 도쿄를 추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다행히 한국도 K-컬처의 영향으로 외국인 관광객 2,000만 명 시대를 열었다고 한다. 서울이야 호텔, 대중교통 등 관광 인프라가 충분하고 미디어에 알려진 명소도 많아 큰 걱정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내 고향 부산은 사정이 다르다. 최근 부산에도 외국인 관광객이 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리지만, 한편으론 급격한 노령화 속에 아파트를 짓겠다고 생산시설을 도시 밖으로 밀어내고 있다는 뉴스가 마음을 무겁게 한다. 내 어린 시절, 인구 400만 명을 바라보며 '대한민국 제2의 도시'라며 위상이 당당했었는데, 지금은 330만 명 선마저 위태롭다. 친구들의 모교들이 폐교되어 추억마저 잃어가는 도시가 되었다. 게다가 8년째 가을 야구 구경도 못 시켜주는 롯데 자이언츠까지 있으니, 부산 사람들의 속은 오죽 답답할까.
도시 경제를 깊이 알지 못하는 아마추어의 시선일지 모른다. 하지만 교토가 보여준 대기업 본사 유치와 관리, 관광에 대한 진심 어린 투자, 택시 기사마저 가이드로 만드는 그 저력만큼은 부산도 벤치마킹할 수 있지 않을까? 속사정은 모르겠지만, 그저 활기찬 교토가 부러워서 해보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