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여행가이드 22] 도쿄 옷 쇼핑(중)

나의 데님

by 하임

도쿄에서 옷을 사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빠진 것이 데님이었다. 단순히 옷을 사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의 역사와 철학을 이해하고 선택하는 과정이 재미있어졌기 때문이다. 정통 데님 브랜드 중 내가 직접 경험해 본 것은 웨어하우스, 풀카운트, 그리고 스튜디오 다치산이다. 경험했다는 것은 옷을 사서 입어보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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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어하우스(Warehouse & Co.) — 내돈남입


웨어하우스는 오사카 파이브의 한 멤버로, 1870년대부터 1970년대의 빈티지 워크웨어를 극단적으로 충실히 복각하는 브랜드이다. 실을 뽑는 방식부터 원단, 재봉, 세탁까지 당시의 방식 그대로 재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도쿄 직영 매장은 에비스(恵比寿) 지구에 있지만, 유라쿠초의 한큐멘즈 백화점에도 입점해 있어 한큐멘즈에 갈 때마다 늘 들렸다. 데님 팬츠나 셔츠, 재킷 외에도 스웨트셔츠, 롱슬리브, 후드 등 대부분의 의류가 복각의 완성도가 높고 원단의 질감이 좋다는 것이 특징이다.

- 웨어하우스 한큐멘즈 도쿄점 https://maps.app.goo.gl/eB1xFdMBkciB9u9X6

ChatGPT Image 2026년 4월 13일 오후 11_10_11.png 유라쿠쵸 <한큐멘즈>

다만 이런 밀리터리나 워크웨어에 관심이 없는 분들이라면 웨어하우스건 풀카운트건 버즈릭슨(Buzz Rickson's)이건, 심지어 가성비 밀리터리의 강자로 불리는 브론슨 MFG(Bronson MFG)이건, 디자인만 놓고 보면 거의 비슷해 보일 수 있다. 대부분이 복각 브랜드라 디자인의 근본이 모두 과거의 군복이나 워크웨어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각 브랜드마다의 특징을 알게 되면 청바지나 청자켓을 입는 것이 아니라 데님을 애정을 가지고 소비하게 되는 브랜드 리스펙이 생기게 된다.

웨어하우스는 팬층이 탄탄한 브랜드라 시즌 제품이 출시되면 바로 솔드아웃 되기 때문에 홈페이지를 새 제품이 나온 걸 보고 가면 거의 항상 없었다는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이 브랜드의 팬들은 거의 마니아 수준이다. 우리 같은 초보들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다. 그러던 재작년 크리스마스 때쯤 2025년 새해맞이 세일의 일환으로 1월 2일 백화점 첫 개장일에 후쿠부쿠로(福袋, 복주머니) 행사를 한다는 공지를 보게 되었다. 후쿠부쿠로는 일본에서 신년에 이월 상품을 모아 내용물을 보여주지 않고 일정 금액에 판매하는 행사인데, 연초에 백화점 여러 브랜드에서 전개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복불복이긴 한데 지불한 금액보다 대체로 높은 가격의 상품들을 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큐멘즈가 1월 2일 오전 11시에 오픈한다고 안내되고 있었지만 머뭇거리다간 후쿠부쿠로도 솔드아웃될 가능성이 높았기에 새해 연휴에 늦잠을 포기하고 서둘러 가니 9시 반이었다. 이미 내 앞에는 20명도 넘게 줄을 서 있었다. 아무리 영하의 날씨를 만나기 힘든 도쿄라도 1월 아침은 싸늘했지만 나보다 더 긴 시간 동안 쌩쌩 지나는 겨울바람을 버티고 서 있는 분들이 20명 이상 계셨고, 대부분이 웨어하우스 아이템 하나 둘 씩은 기본으로 착용하고 있었다. 여기는 번호표를 주지 않고 오픈 시간까지 기다리게 하는 방식이라 1시간 반을 발을 동동 거리며 서 있었다.

그날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오픈하고 매장 앞 복도에서 줄을 서고 있었는데 늦게 온 두어 명이 내 앞으로 끼어드는 일이 있었다. 영어와 일본어로 뒤로 가달라고 하니 한 분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뒤로 갔지만 한 분은 계속 모른 척했다. 어느 나라 분인가 순간 궁금했지만 결국 스태프 분의 안내에 순순히 따르는 걸 보니 외국인은 아닌 듯했다. 그런데 다음 날 회사에 가니 직원들이 일본에서는 그런 경우 그냥 두는 것이 일반적이라면서 내가 좀 과했다고 했다. 갈등을 피하는 것이 일본의 생활 에티켓인지, 아니면 마음에 두고 적당한 표현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일본의 더불어 사는 방식인지는 2년을 도쿄에 살아도 잘 모르겠다.

하여간 후쿠부쿠로로 웨어하우스 옷이 몇 벌 생겼는데, 막상 입어보니 전체적으로 내게는 좀 긴 옷들이었다. 이 옷들의 매력은 오버사이즈 느낌보다 정사이즈 핏으로 입어야 폼이 좀 날 것 같은데, 입어보니 팔 길이나 총장이 내 체형보다 길어서 내가 허수아비가 된 기분이었다. 게다가 제일 기대했던 후드는 너무 두꺼워서 그 위에 외투를 걸치기가 적당하지 않았다.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라 외투를 걸치면 거의 갑옷 입은 사람 같고, 그렇다고 후드 하나 입고 다니자니 너무 춥고 아무래도 내 옷이 아닌 듯했다. 결국 지인에게 방출하였다. 내 돈으로 남이 입게 되었다.


오사카 파이브 — 데님의 역사를 바꾼 다섯 브랜드


풀카운트는 오사카 파이브 중 하나다. 처음 들으면 특정 브랜드 이름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하나의 회사나 제품이 아니라 일본 데님의 흐름을 바꿔놓은 다섯 개 브랜드를 묶어 부르는 이름이다.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청바지는 대량 생산되는 패션 아이템에 가까웠다. 미국의 리바이스(Levi's)가 기준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원형의 디테일과 제작 방식은 점점 단순화되고 있었다. 그때 일본, 특히 오사카를 중심으로 과거의 청바지를 그대로 되살려 보자는 흐름이 시작되었다. 이 흐름의 중심에 있던 다섯 개 브랜드가 바로 오사카 파이브다.

스튜디오 다치산(Studio D'Artisan)은 1979년 창업해 일본에서 최초로 셀비지 데님 복각을 시도한 브랜드이고, 데님(Denime)은 원형에 가까운 복각을 집요하게 추구했다. 에비수(Evisu)는 갈매기 로고로 개성을 더해 데님을 패션 영역으로 확장했고, 풀카운트(Fullcount)는 착용감에 집중했으며, 웨어하우스(Warehouse)는 생산 방식까지 재현하는 극단적 복각을 보여줬다.

이 다섯 브랜드가 만들어낸 변화는 일본 안에서 끝나지 않았다. 사라져 가던 셔틀 직기와 셀비지 데님이 다시 주목받았고, 오래 입을수록 멋이 살아나는 청바지라는 개념이 부활했다. 지금 우리가 흔히 말하는 프리미엄 데님, 셀비지 데님이라는 기준 자체가 이들의 영향 아래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풀카운트(Fullcount) — 내돈내입


풀카운트의 도쿄 매장은 하라주쿠(原宿) 뒷골목 진구마에 3초메(神宮前3丁目)에 있다. 큰길에서 살짝 비껴 있고 매장도 아주 작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 풀카운트 도쿄 숍 https://maps.app.goo.gl/83Jee7FjcvJ8SWn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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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카운트는 짐바브웨산 초장섬유 면화를 사용해 데님 원단을 만드는데, 긴 면사를 쓰기 때문에 이어 붙이는 횟수가 적어 다른 데님에 비해 상당히 부드럽다는 특징이 있다. 일본 데님 브랜드 중 짐바브웨 면화를 최초로 사용한 브랜드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데님 팬츠, 철도노동자 재킷, 롱슬리브, 데님셔츠 등 제법 한두 세트는 갖출 만큼의 옷을 샀다. 부드러움도 좋았지만 어깨선, 소매 길이, 총장 등이 내 체형과 잘 맞았고 주위의 반응도 좋아서 내가 애정하는 브랜드가 되었다. 다만 데님 팬츠 하나에 3만 엔이 넘고 재킷은 4~5만 엔을 넘기니 쉽게 즐기기에 접근성이 좀 떨어지긴 한다. 거주민은 면세가 안 되니 포기해 버리지만, 여행객은 PIE VAT라는 앱으로 면세 처리를 할 수 있다. 시간이 제법 걸리니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가시기 바란다. 한국인 스태프가 근무하는 경우도 많아 의사소통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여기도 홈페이지를 보면서 위시리스트에 있는 제품의 발매일을 체크해 보려고 한다. 그런데 늘 나오자마자 솔드아웃 되는 제품이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옷을 구입하려면 자주 방문해야 하는 곳이다. 내가 무언가를 사려고 노리는 매장이 아니라, 갔다가 마음에 들면 바로 구입해야 하는 곳이다. 게다가 네댓 평 남짓한 좁은 매장에 물건들이 빽빽이 차 있고 스태프들의 도움을 받으려면 다른 손님들을 응대하는 것을 보다가 눈치껏 끼어 들어가야 하는 곳이다. 참 구매하기가 불편한 곳 중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나나 다른 손님들 누구도 불평하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좋은 제품으로 마음 상하지 않는 갑질을 하고 있는 곳이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내가 원하는 걸 구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여하간 이 브랜드는 내 돈으로 사서 내가 입으니 내돈내입인 셈이다.

오사카 파이브 중 데님(Denime)은 아직 매장을 찾지 못해 실물을 본 적이 없고, 에비수(Evisu)는 도쿄 시내 여러 곳에 매장이 있다. 과감한 페인팅이 더해진 스타일이라 나의 취향으로는 늘 패스하게 된다.


스튜디오 다치산(Studio D'Artisan)


스튜디오 다치산 매장은 어느 날 우연히 하라주쿠(原宿) 뒷골목 진구마에 6초메(神宮前6丁目)를 걷다가 지하 1층에 숨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 스튜디오 다치산 도쿄 https://maps.app.goo.gl/ehWJSAskobvBKKFu7


오사카 파이브 중에서도 가장 역사가 긴 브랜드로 1979년 프랑스에서 디자인을 공부한 창업자 타가키 시게하루가 설립했다. 일본 최초로 셀비지 데님 복각을 시도한 브랜드이며 슬로건은 옛 좋은 것들의 재구성이다. 셔틀 직기 방식의 셀비지 데님과 행 염색(hank dyeing)을 결합한 최초의 브랜드로, 행 염색은 며칠에 걸쳐 진행되지만 다른 방식보다 깊은 색감을 내면서도 면의 부드러움을 살릴 수 있다. 데님 외에도 가죽 제품을 잘 다루는 브랜드로 알려져 있다.

매장은 길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연결된다. 간판이 길가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 늘 지나다니면서도 보지 못했던 가게이다. 이 매장에는 다치산이 전개하는 세 개의 브랜드 제품이 함께 진열되어 있다. 들어가 보면 정면과 오른쪽 측면으로 가죽 제품들이 펼쳐져 있고, 왼쪽과 중앙에는 데님 제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실 타이트한 M1형의 가죽옷은 바이크를 타는 거친 형님들의 상징이라, 매장에 들어가는 순간 기가 한 번 꺾이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 간 날 바로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했다. 짙은 인디고 색의 철도 노동자 스타일 재킷이었는데, 너무 마음에 들어 결국 하나 데려왔고 지금도 잘 입고 있다. 가죽 제품도 질감이 좋고 가격이 적당해서 하나 들이고 싶었지만, 가죽은 한 번 집에 들이면 수십 년을 함께해야 하는 옷이다. 주름이 잡히고 스크래치가 더해지며 경년 변화의 멋으로 함께 늙어가는 옷이다. 그런 즐거움을 가지려면 한참 젊을 때 한 벌 과감하게 구입하면 좋을 듯하다. 나는 그 시간을 즐기기에 넉넉한 시간을 갖지는 못할 거 같아, 그 옷들은 나이가 맞고 애정을 가지고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히노야(HINOYA) — 데님 백화점


앞의 오사카 파이브 외에도 모모타로(Momotaro Jeans), 본쿠라(BONCOURA) 등 여러 유명 데님 브랜드들이 도쿄 내 자체 매장이나 편집샵을 통해 유통된다. 여러 브랜드의 데님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곳이 우에노 아메요코초(上野アメ横町)에 있는 히노야(HINOYA)다. 모모타로(Momotaro Jeans), 빅존(Big John), 슈가케인(Sugar Cane), 퓨어블루재팬(Pure Blue Japan), 오니 데님(ONI Denim) 등 주요 브랜드들을 한 매장에서 비교해 볼 수 있는 곳으로, 한마디로 데님 백화점이다. 65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가진 데님 전문점 중 하나이기도 하다. 여러 브랜드의 질감과 디자인 차이를 비교하는 재미가 있는 분이라면 이곳에서 데님에 빠진 시간을 보내기에 더없이 좋다.

- 히노야 https://maps.app.goo.gl/3sBKcHeHffF7ccS18

IMG_0484.HEIC <우에노 아메요코쵸>

사실 이곳은 아메요코를 가끔 들릴 때 그냥 지나치는 곳이었지 들어가서 살펴보는 곳은 아니었다. 앞켠에는 수산물을 팔고 한편에는 이자카야에서 소란한 모임이 진행되고, 길가 식당에는 관광객들의 각종 언어들이 날아다니는 이런 정신없는 우에노 아메요코(上野アメ横) 한복판에, 아무리 진열을 잘해 둔다고 해도 야한 프린팅이 시선을 끄는 옷 가게, 저가의 메이드 인 차이나지만 디자인은 일본이라고 주장하는 브랜드 등과 함께 줄을 맞추고 전형적인 시장 가게 디스플레이를 하고 있는 가게에서 보물 찾기를 하는 것은 나에게는 아사쿠사 쇼텐가(浅草商店街)를 건너가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다.

게다가 가격도 다른 데님 브랜드에 비해 떨어지는 것도 아니어서 이곳은 잘 들리지 않았는데, 최근에 마음을 먹고 한 번 가 보았더니 진작 여기를 왔더라면 차분히 한 번 파 보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밀리터리 복각 브랜드인 리얼맥코이(The Real McCoy's)나 버즈릭슨(Buzz Rickson's)도 소개해 보고 싶지만, 리얼맥코이 하라주쿠(原宿) 매장에 여러 번 방문했음에도 반팔티 외에는 구매한 적이 없어 관심 있는 분들의 몫으로 남겨두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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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주쿠 <리얼맥코이>


도쿄에서 옷을 산다는 것은 결국 취향을 찾아가는 길이다. 사실 데님 관련 브랜드 중에서 내가 가장 많은 소비를 한 곳은 캐피탈(KAPITAL)이다. 처음에는 데님 브랜드 중 하나로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그들의 옷은 베이스는 데님이지만 다른 데님 브랜드와는 전혀 다른 철학적 기반 위에서 만들어진다. 이 브랜드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편으로 넘겨야 할 것 같다. (다음은 도쿄의 옷 쇼핑 하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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