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여행가이드 21] 도쿄 옷 쇼핑(상)

나의 옷장

by 하임
ChatGPT Image 2026년 4월 9일 오후 08_27_39.png <도쿄 옷 쇼핑 팝아트> AI 제공

얼마 전에 만난 지인 중 한 분이 도쿄 여행 가이드의 에피소드 중 하나로 "나의 옷장"을 주제로 글을 써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그러고 보니 도쿄에서 참 많은 옷을 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지인은 내가 옷에 대한 관심도 많고, 여러 스타일의 옷들을 섭렵하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사실 도쿄에 오기 전에는 옷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다. 직업 특성상 슈트를 입을 기회가 많지 않았기에 캐주얼한 의상을 주로 입었는데, 대부분 무채색에 편한 운동화, 브랜드 로고가 없는 옷들이었다. 나 스스로 나의 취향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었기에 서울의 주위 분들에게는 내가 추구하는 취향이 표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도쿄에 와서 우연히 의상 관련 유튜브를 보게 되었고, 난생처음으로 '아메카지'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다. 유튜브에서 소개된 옷의 역사, 스타일 매칭, 색깔의 조합 등을 통해 배우게 되는 옷 관련 정보들은 놀라운 신세계였다. 그동안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옷을 입고 다녔다. 심지어 유투버들이 데님 데님 하는 것이 내가 지금껏 청바지라고 불러온 것의 정식 이름이란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런데 유명 의류 관련 유튜브 콘텐츠들에 나오는 브랜드와 매장들이 대부분 하라주쿠 근처로 집에서 40~5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싶었다. 십수 년 전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서 1층 한편에 숨어 있던 밀레의 '만종'을 처음 직접 보았을 때의 그 흥분과 비슷한 것이었다.


스트리트 패션과의 첫 만남 — 베이프와 휴먼메이드


그런데 아메카지보다 먼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스트리트 패션이었다. 사실 내 취향이라기보다 아들의 취향이었다. 처음 베이프(BAPE, A Bathing Ape) 옷을 사달라고 했을 때는 10년쯤 전이었던 거 같다. 여행 중에 하라주쿠 매장에 가보니 샤크 후드집업이 5~7만 엔에 팔리고 있었다. 디즈니랜드에서나 입을 것 같은 옷이 평상복으로 그 가격이라는 게 놀라웠다. 그런데 도쿄에 살게 되니 아들뿐만 아니라 서울 지인들까지 애들 줄 거라며 휴먼메이드(HUMAN MADE) 옷을 사달라는 연락을 많이 해 왔다. 하라주쿠 휴먼메이드 매장에 간 것은 그렇게 심부름 때문이었다.

- 베이프 스토어 @ 하라주쿠 https://maps.app.goo.gl/tFLRsumGUdY4urtv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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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먼메이드 오프라인 스토어 https://maps.app.goo.gl/jLRUCX3HAvrFP21Z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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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메이드(HUMAN MADE)는 니고(NIGO)가 설립한 브랜드로, 동물 디자인과 강한 로고 플레이가 특징이다. 그가 앞서 만든 베이프와 닮아 있으면서도 결이 조금 다르다. 대표 매장은 하라주쿠에서 조금 떨어진 진구마에 2초메(神宮前2丁目)에 있는데, 블루보틀(Blue Bottle Coffee)과 협업해 블루보틀 테이크아웃 매장이 들어와 있고 콜라보 컵과 텀블러도 판매한다. 백곰 등이 그려진 티셔츠, 스웨트셔츠, 모자 등을 주로 구입했다. 니고의 의상 철학은 'The future is in the past'인데, 솔직히 과거에서 무엇을 가져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동물 프린트와 자수, 큰 HUMAN MADE 로고, 등판 가득한 모토를 보면 누가 봐도 휴먼메이드라는 걸 알 수 있다. 그가 앞서 만든 베이프도 카모(camo) 디자인과 유인원(ape) 그림으로 누가 봐도 베이프임을 알 수 있듯이, 니고는 옷이라는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려놓은 화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면에서는 독보적인 디자이너임이 틀림없다.

휴먼메이드는 매주 토요일 11시에 신제품을 출시한다. 토요일 아침 9시쯤 매장을 방문하면 번호표를 나눠주는데, 그 번호표를 들고 근처를 돌아다니다 11시에 돌아오면 번호 순서대로 입장해 구매할 수 있다. 더 재미있는 것은, 번호표 자체도 추첨으로 배정된다는 점이다. 가장 먼저와 1착으로 기다려도 1번을 주는 것은 아니다. 내가 입장할 순서의 번호를 잘 뽑아야 한다. 부지런함에 약간의 운도 따라야 내가 원하는 옷을 살 수 있다. 처음 매장을 방문했을 때는 일본의 줄 서는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터라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았다. 1만 엔짜리 프린트 반팔 티나 2~3만 엔짜리 캐주얼 셔츠를 사기 위해 한국, 중국, 일본, 스페인어권, 영어권 사람들이 다 모여 줄을 서고 있었다. 줄을 서서 한참 1시간 정도를 기다렸다 내 구매 순서가 돌아오니 일단 사고 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기하는 동안 찾아보니 옷에 대한 리셀가가 높기도 하고, 이렇게까지 많은 세계 사람들이 부지런하게 사려고 하는 것을 외면했다간 시대에 뒤처지는 사람이 될 것 같아 아들의 심부름에 더해 나를 위해서도 몇 벌 구입했다. 대기하는 동안 물욕도 전염되나 보다.


슈프림, 스튜시, 그리고 한국 브랜드들


하라주쿠에서 신제품이 나오는 토요일이면 가장 긴 대기 줄을 자랑하는 곳은 슈프림(Supreme)이다. 시부야 등에도 매장이 있지만 줄의 길이로는 하라주쿠를 따라갈 수 없다. 이 매장은 오쿠하라주쿠(奥原宿)라고 하라주쿠 골목길 안에 있지만 대기 줄은 대로변인 메이지 도오리(明治通り) 쪽에 세운다. 가게 앞에 줄이 보이지 않아 착각하고 2층으로 올라가려 하면 검은 옷의 가드들에게 바로 제지당하며 사나운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아노락(anorak), 프린트 티셔츠, 빨간 배낭, 나이키 에어(Nike Air) 콜라보 운동화 등이 이 집 시그니처지만 내 나이에 이걸 트라이 앤 엔조이(try and enjoy) 하는 게 맞나 싶어 입어 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대신에 모자만 주로 샀다. 야구캡보다 5 각형 캠프캡(camp cap)이 훨씬 눈에 들어왔다. 검은 면 모자에 흰색 슈프림 로고가 정면에 크게 박힌 것이 옷까지는 못 가도 그 브랜드가 지향하는 젊은 도전 정신에는 가까이 가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 슈프림 하라주쿠 https://maps.app.goo.gl/3GbrhzcJALuyf5fX6

IMG_5449.HEIC <오쿠 하라주쿠>

스튜시(Stüssy)에도 자주 들렀지만 한 번도 구매한 적이 없다. 한국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사람들 말에 물욕이 줄어드는 탓도 있고, 하라주쿠 매장에서는 온라인으로 찜해둔 스웨트셔츠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늘 품절이었다. 그렇다고 로고만 보고 다른 디자인의 옷을 3만 엔 가까운 돈을 내고 입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로 인연이 없었던 것이다.

스튜시 매장 맞은편에는 한국 브랜드 디스이즈네버댓(thisisneverthat)이 있다. 2년 전 처음 봤을 때 A.P.C., 칼하트(Carhartt), 슈프림, 스튜시 사이에서 얼마나 버틸까 싶었는데, 지금은 시내를 돌아다니다 이 브랜드 로고의 스웨트셔츠를 입은 분들을 종종 만나고 스튜시만큼 줄을 서는 장면도 가끔 보인다. 그 외에도 시부야 미야시타 파크(Miyashita Park)의 마틴 킴(Matin Kim), 파르코(PARCO)의 오시오(OSHIO) 등 한국 브랜드가 곳곳에 보인다. 며칠 전에는 하라주쿠 근처 팝업샵에서 지나가다 눈에 띈 코어 옷이 있어 들어가 보니 한국 분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가끔은 한국 브랜드 공부도 해야 할 것 같다.

-디스이즈네버댓 도쿄 플래그 스토어 https://maps.app.goo.gl/sWRrgCpk7M893hcA6


아메카지란 문화


처음은 스트리트 패션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 취향은 아닌 것 같았다. 취향의 문제라기보다, 내 얼굴과 체형 자체가 휴먼메이드, 베이프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도쿄 생활을 시작하면서 비슷한 시기에 유튜브를 통해 아메카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아메카지(アメカジ)는 아메리칸 캐주얼(American Casual)의 일본식 줄임말이다. 외래어를 받아들이되 자기 입에 맞게 잘라내는 솜씨가, 어쩌면 일본 문화 전체의 축소판 같기도 하다. 편의점(convenience store)은 콘비니(コンビニ)가 되고, 에어컨(air conditioner)은 에아콘(エアコン)이 되고, 스마트폰(smartphone)은 스마호(スマホ)가 된다. 영어에서 일본어로, 일본어에서 다시 절반으로—절대 원형 그대로 두는 법이 없다. 옷도 마찬가지다. 아메리칸 캐주얼은 아메카지가 되고, 단정한 캐주얼은 기레카지(キレカジ)가 되고, 이성에게 인기 있어 보이는 스타일은 모테카지(モテカジ)가 된다. 스타일에 이름을 붙이고, 이름을 줄이고, 줄인 말로 다시 잡지를 만든다. 번역도 아니고 음역도 아닌, 일본식으로 한 번 더 통과시키는 것이다.

아메카지는 1960년대 일본의 경제 성장기에 팽창하는 남성들의 의상 수요가 미국 옷 수입으로 연결되면서, 미국 복식을 일본 방식으로 해석한 패션 트렌드이다. 대학생들의 교복처럼 단정한 아이비리그(Ivy League) 패션, 질기고 오래 입는 것이 생명인 노동자 워크웨어(workwear) 패션, 편의성과 보호가 주요 목적인 밀리터리(military) 패션—이 세 축의 실용적인 경향이, 디자인을 중심으로 보기에 좋은 옷을 만드는 유럽의 옷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런 실용적인 미국 옷이 일본의 장인 정신과 만나 복각(復刻, 레플리카)을 통해 미국 옷보다 더 미국 옷이 된 아메카지로 발전한 것이다.

노동자 의상을 대변하는 데님의 경우, 미국의 워크웨어 브랜드 리바이스(Levi's)의 1950년대 전후 시리즈를 복각하면서 일본 데님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리바이스가 비용 절감을 위해 생산시설을 개발도상국으로 옮길 때, 일본 데님 브랜드들은 세계적인 염색 기술로 원단의 우위를 유지하면서 1950년대 리바이스가 생산될 때의 재봉틀을 수입하고 허리춤의 브랜드 패치(patch)와 리벳(rivet), 단추 등 부자재까지 그 시대 방식 그대로 재현했다. 덕분에 전 세계 데님 마니아들에게 '데님 하면 일본'이라는 이미지가 생겨났다.

밀리터리 패션도 마찬가지다. 전후 일본에서 미군 중고품으로 시작된 유행이 복각 제품으로 이어졌고, 한국 남성들이 군대 기억 탓에 밀리터리 의상을 꺼리는 것과 달리 일본에서는 남녀 모두 밀리터리 의상을 하나의 멋으로 받아들인다. MA-1 항공점퍼(flight jacket), M-65 필드재킷(field jacket), 피코트(pea coat)—미군이 실제로 입던 군복들이 일본 빈티지 시장을 거치면서 하나씩 패션 아이템으로 재탄생했다. 데님과 마찬가지로 일본 브랜드들은 단순한 모방에 그치지 않았다. 당시 군납 사양서까지 뒤져가며 원단의 두께와 조직, 지퍼 브랜드, 심지어 봉제 방식까지 재현했다. 입는 사람도 그 디테일을 안다. 그래서 일본의 밀리터리 패션은 단순히 '군대스러운 옷'이 아니라, 특정 시대의 특정 군복을 얼마나 정확하게 재현했느냐를 두고 이야기하는 문화가 됐다.

아메카지가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데는 세 가지 힘이 작용했다. 먼저 수요 측면에서는, 특정 시대의 옷을 정확하게 재현해야 직성이 풀리는 마니아들의 집착에 가까운 열정이 있었다. 공급 측면에서는, 그 집착에 응답할 수 있는 장인 정신이 있었다. 그리고 이 둘을 연결한 것이 편집샵과 잡지였다.

1976년, 하라주쿠에 미국 옷을 파는 작은 편집샵 빔즈(BEAMS)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해 몇 달 후, '시티 보이를 위한 잡지'를 표방한 포파이(POPEYE)가 창간되었다. 포파이는 무명이었던 빔즈를 발굴해 잡지에 소개했고, 두 브랜드는 아메카지라는 같은 비전을 공유하며 함께 성장했다. 빔즈가 매장이었다면 포파이는 교과서였던 셈이다.


빔즈(BEAMS), 일본 편집샵의 시조


처음 밀리터리 바지 하나를 사고 싶어졌다. 평소 스타일로는 완전한 일탈이었다. 처음 찾은 곳이 하라주쿠의 빔즈 플러스였다. 빔즈(BEAMS)는 일본 편집샵의 시조다. 빔즈 출신이 독립해서 만든 것이 유나이티드 애로우즈(United Arrows)인데, 빔즈와 유나이티드 애로우즈가 일본 남성 편집샵의 양대 산맥이다.

- 빔즈 플러스 하라주쿠 스토어 https://maps.app.goo.gl/RGnXDvMoYe9znv4g8


메이지 도오리(明治通り) 끝 쪽에 빔즈 이름이 붙은 가게가 3개 이어진다. 그중 하나는 빔즈 플러스로 밀리터리나 워크웨어를 취급하는 아메카지 매장이고 다른 하나는 빔즈 보이라고 해서 여성 의류 취급점이고 나머지 한 곳은 하라주쿠 빔즈로 콜라보 제품이나 스트리트 패션 위주의 의류를 취급하고 있다. 하라주쿠 빔즈 매장에서 한 동안 빅 히트를 쳤던 제품은 아크테릭스(Arc'teryx)와 콜라보한 고어텍스(GORE-TEX) 아웃웨어로 아크테릭스 오리지널에는 없는 밝은 색상을 사용해 등산할 때나 입던 아웃도어 의류와 신발을 데일리 룩으로 전환한 고프코어(gorpcore) 트렌드를 대표하는 아이템 중 하나가 되었다. 다만 가격이 10만 엔 남짓이라 결국 눈요기에 그쳤다.

빔즈는 하라주쿠 외에도 시부야(渋谷), 신주쿠(新宿), 긴자(銀座), 마루노우치(丸の内) 등에 있지만 매장마다 특색이 다르다. 시부야·신주쿠는 여행객을 위한 소품과 기념품이 눈에 띄고, 긴자는 3만 엔 이하의 유행하는 옷들이 주로 보이며, 하라주쿠는 패션 마니아를 위한 유니크한 의상 중심이다. 마루노우치는 현지 직장인을 위한 공간으로 보인다.

IMG_6087.heic <빔즈 긴자>

빔즈에는 좁은 공간에 현재 유행을 반영한 많은 종류의 옷이 진열되어 있다. 유행에 밝은 분들은 취향에 맞는 것을 찾아내기가 어렵지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선택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내가 입었을 때 주위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를 두고—그러니까 옷 자체보다 평가에 대해 고민하면서—긴 시간을 살까 말까 망설이게 된다. 옷이 몇 벌 없으면 고민의 시간은 짧아지지만, 옷의 종류나 브랜드가 많을수록 고민의 시간은 그만큼 더 늘어나게 된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서너 번 방문한 이후에는 더 가지 않게 되었다. 이런 고민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찾아간 곳은 정통 데님 브랜드들이었다.


도쿄에서 산 옷들은 결국 내 옷장이 되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바뀐 것은 옷장이 아니라 나였던 것 같다.

무엇을 입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무엇이 나에게 어울리는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조금씩 더 알게 되었다. 예전에는 옷은 단순히 입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작은 표현이 되었다. 그래서 도쿄에서의 옷 쇼핑은 소비의 기록이 아니라 나의 취향이 만들어지는 과정이었다. 도쿄는 그렇게, 내 옷장 안에 남아 있다. (다음은 도쿄 옷 쇼핑 중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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