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나_11
자랑이라고 할 것도 없고 겉으로 보기에는 꽤나 번듯한 사람이다. 여중여고를 나왔고 적당한 상위권의 성적이었다. 국립대학교 대학원을 나오면서 등록금으로 애먹여본 적도 없고 이과계열로 나름 장학금도 받아서 졸업했다. 논문도 꽤나 썼고 나쁘지 않은 실적이었다. 쉼 없이 바로 회사에 취직했고 소위말하는 고소득자로 부족함 없이 지내고 있다. 적어도 부모님에게 "딸내미 번듯하게 잘 자랐네요"소리는 듣게 한다.
그런 나는 알고 보면 구멍 뚫린 치즈처럼 허술한 인간이다. 나만의 사건사고도 많고 여전히 나는 그런 나를 돌봐주고 있다. 오늘은 마음이 꽉 막혀있다. 눈물은 나올 듯 나오지 않는다. 왜 가끔 다쳤을 때 피가 피부 속에 고여있는 그런 거. 바늘로 찔러서 터뜨리기에는 너무 깊고 그냥 두기에는 또 아픈 그런 상태. 최근 나름 많은 일들이 휘몰아쳤고, 쿨하지 못한 내 마음은 그냥 오롯이 다쳐버렸다. 항상 그럴 수 있을 거라고, 결국 그들은 나를 떠나버릴 거라고. 이 관계는 영원한 게 아니라고 되뇌고 또 되뇌는데도 막상 그렇게 되어버리면 정말 어찌할 줄을 모를 정도로 너무 아파버린다.
좋아한다는 말조차도 내뱉기 어려워서 이 말을 할 수 있는 타이밍일까? 말을 해도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수십 번을 생각하고 말을 하는데도 결국 타이밍이 안 맞으면 또 결국 기대하던 반응이 아니면 그다음엔 더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다시 상처받기 싫으니까. 말하지 못해서 표현하지 못해서 오는 상처와 예상치 못한 반응으로 오는 상처. 무엇이 더 아픈 걸까? 이것도 저것도 나는 다 아픈데. 회사 안에서 밖을 바라보니 유난히 햇살이 쨍하다. 멍하니 바라보기에는 너무 눈이 부신다. 어떻게 사람들은 서로 좋은 타이밍에 좋은 티키타카로 서로의 인연을 만나는 것일까? 어떻게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보일까 고민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는 것일까? 다들 쿨해서 그런 걸까?
남들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나 외의 간극이 너무 커서 내가 지금 이렇게 힘든 것일까? 굉장히 솔직하고 감정적인 사람인데 남들의 시선이 중요한 것인지, 괜찮은 척 안 아픈 척 별일 없는 척 살아가는 게 오늘 좀 힘이 든다. 나의 약점은 말하지 말라고 한다. 나의 취약점은 숨겨야 한다고 한다. 난 약점은 오픈하면 더 이상 약점이 아닌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상대에게 검을 쥐어주는 것이라고 한다. 남의 약점을 가지고 공격하려고 하는 게 잘못된 게 아닌가 항변해 보지만. 공격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에게 환 봤자 무슨 소용 있나. 무서운 거겠지. 나 이런 사람입니다. 나 정말 형편없는 사람입니다. 광고하는 게 무서운 거겠지.
부족하다고 말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지 않나. 그냥 내 기준인 거다. 내 기준으로 내 만족으로 내가 남들한테 잘 보이고 싶은 거겠지. 그러니까 저렇게 척하면서 그 갭에 괴로워하는 거겠지. 오늘 도만 해도 사람들은 물었다. 오늘 무슨 좋은 일이 있냐고, 왜 이렇게 텐션이 좋냐고. 그런데 지금 나는 당장 세상 누구보다도 우울한 상태이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누군가에게 외면당했고, 또 외면당할 준비를 하고 있기에 몹시 우울한 상태이다. 그런 게 사실 그런 것도 있다. 지금 내가 우울한걸 사람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할 것도 아니고, 얘기를 한들 누군가 해결책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 보니 그럴 바에 그냥 웃지. 의 결론에 다다르는 거다.
감정이 조금 추슬러지지 않아서 주섬주섬 운동 갈 준비를 하고 헬스장으로 간다. 회사 내에 헬스장이 있다 보니 가기 쉬운 환경이다. 헬스장에서 아무 생각 없이 스포츠 경기나 드라마를 보면서 걷고 뛰고, 또 근력운동을 하노라면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주 잠시나마 그 땀 흘리는 시간 동안 잊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이 기분을. 이 기분은 사라질 순 없다. 해결이 된 것 도아니고,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그냥 잠시 망각할 수 있는 것일 뿐. 그래도 땀 흘리고 씻고 나면 건강해지기라도 하니 효과는 좋다. 지난 일을 적으면서 온 우울함을 다스리기가 쉽지 않다. 애써 묻었던 기억들이었는데 이렇게 다시금 기억소환을 해버리다니. 그런데 참 당혹스러운 것은. 분명히 좋은 기억도 있고, 좋은 기억도 소환하는데. 좋은 기억은 생각보다 짧게 잔상으로 머물다 사라진다. 나쁜 기억은 뭔가 모세혈관처럼 쥐어짜듯 빈틈없이 아픈데 좋은 기억은 잠깐의 전기충격기처럼 강렬하게 한번 들어오고는 사그라들고 만다. 반대면 참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