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인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들이 당신의 삶을 바꾸기 위해 필요하거나, 당신이 그들의 삶을 바꿀 사람이기 때문이다.”
심리적인 관점에서 맞는 말이다.
상대방과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고 가정할 때 내가 상대방에게 관심을 느끼는 것은, 그 사람이 현재 나의 결핍이나 욕구 등을 충족시켜 준다 거나, 내가 원하는 목표나 무언가에 대해 조금 더 나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 같은, 그 사람에게 어떤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뿐 아니라 모든 것이 그렇다. 본인이 무언가에 대한 욕구가 있다는 것은, ‘결핍’ 또는 ‘내가 나아가고 싶은 길’에 대한 ‘목적성 행동’을 하고 싶어서 일 가능성이 크다.
‘모든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이유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의미의 전달이 될지는 모르겠다. 까닭, 근거, 원인, 조건. 어떠한 사건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모든 것에는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어서 그렇게 이루어진다.
모든 것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내가 보는 것, 듣는 것, 먹는 것. 그것을 왜 보는지, 왜 듣는지, 왜 먹는지. ‘행동의 이유’라는 것은 정말 사소하고 작은 단위까지 이어진다. 갑자기 ‘에그타르트’가 먹고 싶으면, 어제 지나가는 길에 카페 메뉴판에서 에그타르트를 봤다거나, 아침에 일어났는데 고작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에그타르트’와 연관이 지어질 수 있다.
정말 그렇다. 영화 ‘나우 유 씨 미: 마술사기단’에서는, 자산가와의 돈내기에서 그가 생각하는 등번호를 맞추기 위해 며칠 동안 그 번호의 숫자를 그에게 노출시킨다. 그리고 결국 그는 그 번호를 고른다.
이것은 단순하게 생각해 봤을 때 당연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라고 가정할 때, 가장 친근한 엄마가 4라는 숫자만 보여주고 들려주면, 그는 4라는 숫자를 가장 좋아하게 된다. 다른 숫자를 모르기 때문이다. 뇌에 입력한 정보가 있기 때문에, 자신이 그것을 토대로 선택을 내린다.
다리를 떠는 것도 이유가 있고,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 심지어 굳이 따지자면 내가 무엇을 보는 것까지도 그렇다. 심리적인 것, 필요에 따른 움직임, 그리고 습관들.
이것은 정말 당연한 것인데, 생각해 보면 소름이 돋는다. 나의 몸을 의식을 했을 때 호흡, 나의 표정, 현재 몸의 근육들이 어느 곳이 경직되어 있는지까지, 이 모든 것이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앉아있는 자세부터, 글을 읽고 어떤 생각과 사고방식을 하는 지까지 말이다.
하지만 모든 이유에 대해 자세하고 정확하게 알 필요는 없다. 그럴 수도 없고 그러면 너무 좋겠지만, 그렇게 살면 너무 피곤하다. 정말 진심으로 관심 있고 궁금한 것은 그 이유를 찾는 ‘이유’가 있게 되어있다.
단지 이 사실을 알고 삶에 적용하는 것만으로 삶은 달라진다.
일단 나부터. 내가 지금 이런 감정을 왜 느끼는지, 지금 왜 갑자기 여행을 가고 싶은 지, 일탈이 하고 싶은 지, 최근 어떤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지금 어떤 행동을 해야 최선인지, 표현해야 하는지, 체념해야 하는지, 산책해야 하는지.
그리고 다른 사람.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생겼는지, 어떤 얼굴 근육이 저 사람의 인상을 저렇게 만들었는지, 왜 저런 말투를 가지고 있는지, 왜 저런 단어를 선택하는지.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 즉 인간에 대한 이해심을 넓힌다는 것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뿌리를 더 깊게 내리는 것이다. 앞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며 일어날 사건들에 대한 준비이자, 앞으로 내가 선택해야 하는 순간들에 대한 존중이다.
나는 가끔 깊게 생각했다. 그럼 지구가 존재하고 이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도 있지 않을까.
꽃은 왜 아름다운지, 고통은 왜 존재하는지… 내가 존재할 필요가 있는 건지?
체념하고, 무기력해지기도 하고… 모든 것이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물론 관대해지고, 이해심이 넓어지고, 포용력이 넓어지는 것은 좋지만, 정작 나의 기준이, 나의 자아가 사라진다. 나의 존재의 이유조차 찾지 않을 때도 있다.
이것은 ‘게으름’이라는 이유다.
‘어차피 운명은 다 정해져 있는데 뭐’나, ‘어차피 나중에 다시 배고플 텐데 왜 먹어’ 정도 일 것이다.
게으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상처받았다든가, 목표가 사라졌다든가. 이럴 땐 용기가 필요하다.
당신은 운명론자인가?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하든지 하지 않든지, 그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그럼 까놓고 말해서 존재해도, 존재하지 않아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존재해도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고, 존재하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다.
확실한 것은, 삶에 대한 용기를 가지기만 하면, 불확실하기 때문에 더더욱 자신 있게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해할 것이 아니라, ‘인생이 불확실해서’ 자신 있고 확실하게 그리고 소신 있게 행동할 수 있다.
나는 운명론자다.
운명이 바뀌는 것조차 운명이다.
지금 이 순간, 이 시점의 시간을 보내게 된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운명조차,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