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신이 부족한 것에 대해 합리화를 하게 되어있다. 그렇지 않은가? 간디가 만약 싸움을 잘했다면 열차에서 그들을 이겼을 것이다. 그래서 ‘비폭력 간디’가 안되었을 수도.
“나 백양초등학교 2통인데, 우리 싸워볼래?” 내가 말했다. (*2통 : 2번째로 싸움을 잘하는 사람.)
그는 2통이 아니었다. 전학을 와서 사기를 친 것이다.
"..갑자기? 왜?"
"그냥 싸워보고 싶어서! 네가 잘 싸운다길래. 네가 얼마나 잘 싸우는지 궁금해."
그 학교에서 꽤나 악동이었던 상대방은 싸움을 거절했다. 내가 미친놈처럼 보였을 것이다. 처음 보는 애가 아무 이유도 없이 싸우자고 하는데, 와중에 미소를 띠면서 이렇게 친절하게 설득을 하려 한다니. ‘얘는 지금 엄청 싸우고 싶구나’하지 않았을까.
결국 나중에는 들통 났다. 난 싸움을 잘하지 못한다. 만약 내가 싸움을 잘했다면 상황에 따른 폭력은 정당하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폭력이 왜 부당한지에 대해 고민했다. 나의 결핍을, 그것이 어떤 조건이든, 정당화를 시켜야 했다. 과연 폭력이라는 것을 나의 기준에서 '어떻게' 납득하고 살아야 내 인생이 편할지.
싸움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스포츠 (- 격투기, 복싱 등) 형식의 싸움, 힘을 과시하기 위한 싸움, 감정의 언어 등등.
일단 내가 격투기나 복싱을 하지 않으니 그런 종류의 싸움은 나와 관련이 없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싸움의 대부분은 감정조절을 못해서 자기 통제를 하지 못하거나, 힘을 과시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무리 내에서 힘을 좀 쓴다싶은 애들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주먹부터 나왔다. 내가 이해해야할 것은 둘 중 하나였다. 결핍이 있어 감정을 다루는 것이 서툰 사람이나, 아니면 사자가 되고픈 사람.
솔직히 그들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의미없는 힘 싸움을 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하지만 나 또한 그들에게 맞고 다닐 수는 없으니, 그들을 이해하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가장 불쌍한 사람은 나였을지도 모른다. 싸움도 뭣도 잘하는 것도 없는데, 정작 하려는 것은 사자를 다루는 동물 사육사 따위이니 말이다. 동물 사육사. 난 언제나 그 역할을 맡고 있었다.
누군가는 마치 둔하고 멍청한 골리앗이나, 바보 온달 정도로 보였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을 잘 다루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원하는 것이 있었는데, 하지만 중요한 점은 정작 본인은 자기가 뭘 원하는지도 모른다. 감정에 빠져 욕심과 조급함이 생겼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이뤄내지 못한 채 폭력으로 인해 자신의 목적과 멀어지는 상황을 초래했다. 사람은 감정에 빠질 때 시야가 좁아진다. 그 때는 무의식적인 상태가 되는데, 그것은 욕구나 본능과 가깝다. 욕구, 본능. 그것은 동물과 가깝다.
힘을 과시하려는 자, 그들 또한 동물에 가까웠다. 폭력은 자신의 물리적인 힘을 이용해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가장 눈에 잘 드러나는 행동이었고, 상대를 굴복시켜 자신이 그 상대보다 우위에 있다는 안정감을 얻으려 하는, 사자가 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골리앗과 온달, 동물 또는 짐승. 그리고 사육사. 자세히 들여다 보면 누구 하나 잘난 것 없는 이들은, 각자 개인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간다.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작은 것들을 하나씩 수행한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
폭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넓은 관점이 필요했다. 사실 세상 모든 것은 폭력으로 이루어져 있고, 감성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개념만 바뀌면 폭력의 종류도 다양해진다는 관점. 실제로 폭력의 의미엔 정신·신체적 압박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한 의미적 관점으로서 폭력의 종류는 훨씬 다양하다. 인간은 신체적인 손상 뿐만이 아닌 눈빛, 목소리 그리고 손가락으로도 때릴 수 있다. 의도하지 않고 폭력을 행사하고, 은연 중 폭력이 오고 가는 세상에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갑자기 뺨을 맞은 상황에서도 할렐루야를 외칠 수 있을 것인가.
학창시절 동물사육사 경력자로서 그들을 관찰하고 학습한 결과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는데, 폭력은 '무(無)'에서 오지 않는다. 폭력은 행하는 자나 당하는 자, 둘 중 어느 하나에서의 '변화'에서 온다. 물론 그것은 일방적일 수도 있다 (-묻지마 폭행/살인 같은). 어쨌든 폭력을 사용하는 이유는 <내적인 변화>다. 배고파서, 기분이 나빠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액션영화’에서의 폭력은 가장 정당해보인다. 영화에선 물리적인 복수를 해야만 주인공의 목적이 이뤄질 수 있는 극한의 상황을 설정하는데, 심지어 그런 상황에서도 주인공은 무조건적으로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캐릭터의 성격은 이성적인 존재로 만들어져 있고, 그러한 성격을 부여한 채 '폭력이 필요한' 상황을 함께 부여하면 우린 주인공이 아무리 잔인하고 극악무도해도 '정당하다고' 느끼게 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주인공의 성격과 그의 상황을 안다면 그것이 적어도 '그의 입장에서는' 정당해진다는 것.
폭력이 정당화가 될 수 있을까?
신체적, 정신적인 것을 포함한 모든 의도치 않은 폭력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한 채로, 어떤 상황에서든 그 어떤 폭력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 있고, 그럴 수 있다면 정말 스스로도 앞으로 절대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거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폭력은 정당화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간과할만한 사실이 있다. ‘정당화’라는 것은 하나의 판단이기 때문에, 정답이 존재하는 논제가 아니다. 단지 질문, 그 자체이다.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만, 인간이기에 그것은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마냥 폭력이 정당화되어선 안된다고 외치며 살아가기엔 나의 안전이 언제 위협받을지, 두렵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폭력의 범위를 이해하고, '가해자'라는 주인공의 성격과 상황을 최대한 '감안'하는 것.
우리는 목적을 이루며 살아간다.
힘이 없는 자는 언제나 타협과 합리화, 두 가지에서 줄타기한다. 사실 애초에 정답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린 정답이 없는, 너무나도 모순적인 것들이 많은 세상에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