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을 마치고 쏟아져 나오는 관객처럼 궁금한 고향소식 듣고 싶어 줄을 썼던 사람들 바쁘게 살다 지나쳐버린 시간을 보상하듯 보따리 보따리마다 선물들을 마음에 담는다 푸근하게 차오르는 얼굴들 마음은 벌써 도착한 듯 반갑게 기차표를 받아 든다 언제 한 번 가보려나 평범한 일상에서 기다려지는 아주 특별한 날들의 휴가 아늑한 시골집 풍기역으로 가던 완행열차 서둘러서 미리 표 예매하지 않으면 하루 종일 서서 가야 하는 불편한 진실 속에서도 하얀 밤을 밝히며 말없이 달려갔다
운 좋게도 표를 얻은 사람들은 피곤한 삶을 아무렇지 않은 듯 앞다투어 빈 틈 없이 내려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렸지만 불평불만 없이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 같은 부픈 희망은 하루하루 특별하지 않는 삶에서 새로운 길을 보여주는 마지막 남은 비상구였는지도 모른다
시골 오일장같이 시끌벅적 기차 안은 전국의 모든 사람들이 모이는 새벽 인력시장의 얼굴 힘들고 지루한 여행이었지만 간이역마다 쉬어가며 서둘러 타고 내리는 투박한 사투리들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쉴 틈 없이 달리는 좁은 공간 가끔 좋은 아저씨들 있기 마련이다 어린 나를 기분 좋게 자신의 무릎을 내어 주시며 힘들어 보이는 어머니에게 웃으며 자리를 양보해주시는 넉넉한 마음들이 있어 길게만 느껴지는 여행도 편안하게 다가왔다
쉬엄쉬엄 역마다 서커스 정기공연하듯 가다 서다 반복하는 드라마 모든 역을 들리다 보니 우습게도 나는 지나는 역과 터널 숫자를 세는 습관 아닌 습관이 생겼다 하나, 둘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마다 멀게 만 느껴졌던 종착역이 더 빨리 다가오길 기도했다 시간이 멈추어버린 순간들 집시처럼 노래하는 대학생들 멋진 기타 연주와 흥에 겨운 박수소리 지루한 여백을 달래주었다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오래된 친구처럼 넉살 좋게 친구가 되어 소주 한 잔 걸치고 대부분은 잘 지나갔지만 술에 취해 노래하며 횡설수설하는 무법자들과 밀고 당기는 한 판 승부 애가 타는 차장들은 감당하기 힘든 긴 밤을 보내야만 했었다
지루한 시간을 보상이라도 하듯 도착할 때까지 "짝짝" 소리를 내며 잔돈을 놓고 심심풀이 "이야 고다! 얼씨구 스톱이다"을 외치며 누가 고수인가 자랑 아닌 자랑들을 늘어놓는 재미난 아저씨들 어디에 살고 계실까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실까 궁금해진다
어둠을 삼키며 새벽을 달리는 일은 영화 속 닥터지바고 설원을 달리는 마차같이 흥미로운 삶의 연속이었다 눈물 많으셨던 외할머님은 떠나신 지 오래되었지만 이제 어머님의 어머니 나이가 되셔서 완행열차 탈 일이 사라져 버렸다 해마다 머리엔 보따리 양손엔 짐, 그리고 아이들 셋, 멀고도 힘든 길을 어머님은 오랜 세월 우리 삼 남매와 함께 다니셨다 난 어머님 덕분에 덜커덩덜커덩 가장 남쪽 마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내륙 시골마을까지 소설보다 흥미진진한 경험을얻었다 속옷 깊숙이 아꺼둔 용돈을 꺼내 주시며 우리의 뒷모습이 살아질 때까지 손을 흔드시던 외할머님 날마다 자식 걱정 기다리시던 잠들어 계신 고향 한 번 모시고 가 보고 싶다 한 번씩 외할아버님 산소를 걱정하시는 다리가 불편하신 어머님 늦기 전에 모시고 가 보고 싶다 보고픈 밤이 지나면 더 이상 달릴 수가 없었던 진실은 늦은 새벽에도 잠 못 드시고 삐그덕 방문을 열고 나오시던 반가운 얼굴 함초로이 눈 감으면 보름달처럼 살며시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