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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간의 상호작용의 존재론적 형상화 시 감상


#시간과 공간의 상호작용의 존재론적 형상화 시 감상


송수권(시인, 전 순천대학교 교수, 1940.3.15~2016.4.4.)


1. 序

케네디 버크(K. Buke)는 시의 소재를 둘로 나누고 있다.

외적소재(extrinsic - matter)와 다른 하나는 내적소재(intrinsic - matter)다. 그런데 버크는 작품이 독자에게 주는 심리적 효과를 또 크게 두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작품의 내용, 즉 소재가 주는 효과이며, 둘째는 작품의 형식이 주는 효과다. 그는 전자를 정보의 심리, 후자를 형태의 심리라고 불렀다. 정보의 심리는 작품의 소재가 독자에게 주는 감동(충격)이 새로운 정보의 전달에서 오는 경이로움과 긴장 관계이다. 이는 현대시의 본질을 낯설게 하기에서 찾는 것과 같다. 그리고 형태의 심리적 효과는 형식이 갖는 적합성에서 오는 미적 쾌감이다. 따라서 정보의 심리와 형태의 심리는 반비례 관계에 있다고 한다. 이번에 감상하고자 하는 시는 이근모 시인의 시 중에서 주제와 서에서 밝힌 정보의 심리 형태로 구성된 시, 몇편을 가지고 감상을 할까한다.


2. 시 감상

이근모 시인의 시 세계와 정신의 코드는 형태심리보다는 정보의 심리면에서 고찰할 수 있을것 같다. 그의 시편들에서는 회감의 낯익은 정서보다는 자기 존재의 모습을 드러내는 탈속의 경지에 대한 시편들이 단연 개성적이고 독보적으로 읽힌다. 이는 구경적 삶의 존재 양태로서 자기 고백적이고 반성적인 태도에서 오는 언어들이다.

'예순의 구색' '찌리리 우는 소리' 그의 제4시집의 제시로 떠오른 '그저 걷는 것이다' '아직' 등은 은유 체계를 완성한 절창으로 읽힌다. 다시 말하면 현실(리얼리티) 대응 방안으로서의 언어들이 팽팽한 드라마틱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구색이란 참으로 곤혹한 치장이다.

구색을 갖추지 못한 치장이

아름다움과 진실의 가장자리 쯤에서 배회를 하면

두런두런 화려한 꽃들의 수다가 계속된다.

그러다 헛디딘 수다 한 발자국이

바람을 타고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가

수 없는 발자국을 남기면

구색은 그만 그늘진 구석으로 등을 웅크린다.

곤혹한 치장이 곤욕한 치장으로

얼굴이 붉어지는 노을이야말로

달력 안에 새겨 두었던 가지가지 구색들이

여태껏 살아온 생에 먹구름을 칠하고

한바탕 폭우를 쏟아붓게 한다.

폭우 그치고 햇살 한 줌 빼꼼히

얼굴 내밀어도 까다로운 구색은

주름살에 갇아두었던 넋두리를

썬팅 하듯 메꿀 뿐이다.

어차피 구색이란

삶의 가장자리를 배회하는 매무새일 뿐이다.

진실의 탈춤일 뿐이다.

구색 찾아 60리를 걸어온 생이

또 얼마만큼 걸어야 할지

미지수에 걸어둔 구색이 히죽히죽 웃고 있다.


-예순의 具色 전문-


제3시집 ''지독한 여자''에서 발췌한 이 시는 '존재의 탈속' 그 삶의 경지를 노래한 시다. 우리는 이러한 삶을 구경적(究境的)인 삶이라고 한다. 나이 들수록 비워둠 또는 비워가는 삶은 아름답다. 시인은 이를 역설적으로 진실의 탈춤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구색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삶의 잡다함 또는 잡다함으로 치장 되는 도구적 삶을 뜻한다. 도구적 삶에 잡혔을 때 영혼은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은 구속이고 억압이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독자들은 무소유를 연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시의 아날로지는 그 무소유와는 거리가 먼 것 같다. 무소유란 불교의 사상철학 즉, 유심론의 정점을 말하지만 '어차피 구색이란/ 삶의 가장자리를 배회하는 매무새일 뿐이다'라는 말은 무소유란 전체의 비워둠이 아니라 가진 것을 조금씩 비워가는 삶의 한 과정임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구색의 잡다한 착(着)에 대하여 도구적 삶을 조금씩 내려놓는다는 뜻이다. 즉 방하착(放下着)이다. 지천명을 벗어나고 이순(耳順)에 이르면 귀가 순해져서 탈속의 경지에 이름은 지극한 삶이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제4시집에서 보이는 '찌리리 우는 소리'와 같은 시를 인용해도 좋을것 같다.


낮에도 밤에도

비오는 날에도, 화창한 날에도

귓속에서 맴도는 귀뚜라미 한 마리가 우는

찌리리 소리

계절을 뛰어넘어 때 이른 봄부터

귓속에 터 잡고 연주회를 연다.

그 소리 마음 따라

어쩔 때는 우는 소리

어쩔 때는 웃는 소리

오늘은 너무나도 처량하게 울고 있나니

가을 밤 귀뚜라미 소리로 ---


찌리리 찌리리

나이테를 감고 있는 달팽이관 삶의 역사가

또 한 페이지 접혀 간다.


-찌리리 우는 소리 전문-


소라 뿔고동 속 같은 귓속에서 우는 귀뚜라미 소리는 처연함을 넘어 '예순의 구색'으로 들린다. 즉 자족의 기쁨으로 들리는 아름답고도 넉넉한 소리로 들린다. 이것이 이순의 나이다. 이 쯤에서 삶의 도(道)가 무엇이냐고 화두를 던진다면 끽다거(喫茶去)라는 조주의 선법이 생각난다.

도(道)란 한마디로 평상심 즉, 마음이 부처라는 평상심을 이르는 말이다. '차나 한 잔 하고 가게'라는 이 화두는 '찌리리 찌리리' 우는 귀뚜라미 소리로 각인된 것 같다.

이른바 '예순의 구색'에서 보여주는 자족의 기쁨이다.



어둠은 발톱을 쩍쩍 갈라 놓는다.

그래도 우리는

발톱 밑에 배접하고

오늘도 걷고 있다.

아직도 우리는

반짝이는 별의 꿈을 믿고 있으므로

저 창공의 무수한 어둠을

걷어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 - -

뭉개진 발톱에서 꼬락내가 게워 나오는 것은

창공에 흩뿌려진 어둠의 냄새를

우리는 아직도 걷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저 걷는 것이다.

발톱의 순결을 믿기 때문에

어둠이 가시고 여명이 틀 때

찬란한 태양은

걷다 뭉개진 발가락 핱아줄 것이므로

그래, 걷는 것이다.

무수한 어둠이 뒤꿈치를 물어뜯고 있기에

우리는 뜯기지 않기 위해 그 어둠만큼

그저 걷는 것이다.


-그저 걷는 것이다 전문-


<<그저 걷는 것이다>>라는 이근모의 이 시는 제4시집의 표제시다. 이 시는 무엇을 뜻하는 걸까? 자기 정체성이 없는 '내 마음 나도 몰라'라는 흥얼거림이 아니라 '발톱 밑에 배접(褙接)을 하고' 서라도 걷는 길이다. 삶은 관념적인 언어가 아니라 행동이 투입되는 걸음으로서 존재하는 길이다. 이 길의 상상력은 미완이면서도 영원한 길이다. 현실은 빨리 무너져도 상상력은 영원하다는 말은 이 말이다. 삶이 아름다운 것은 삶 자체가 미완이기 때문이다. 배접이란 말은 이 시의 주도어로서 시상 전체를 휘어잡는 미완을 뜻하는 '세월' 이란 말과 동격의 시어가 되고 힘있게 울림을 준다. 삶이 아름다운 것은 이 처럼 세월 속에 내가 비껴가는 회향의 길이기에 그렇다.

역설적으로 뒤집으면 그 길은 영원한 청춘의 길이며 '아직' 오지 않은 길이다. 따라서 미완의 공간과 시간에 수렴될 수 있는 말은 '아직'이란 미 지칭의 말 뿐이다. 그래서 아득하고 멀다.



그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우린 아직 청춘이다.

아직 가시지 않은 흥분에

찬란을 비상해 보지만

계절은 아직 겨울이고

봄은 아직 멀었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나도 아직, 너도 아직, 우리도 아직

수면안대 잡고 있는 대낮 그림자도 아직 이다.

사방 고요 안에 퍼져가는 아직 이여

촛불 기도도 아직 이다.

도망치는 대낮의 마침표 찍는 아직에

저녁이 먼저 온다.

그래도 별이 뜨기에는 아직 멀었고,

누군가가 묻는다.

샛별 언제쯤 반짝이냐고.


-아직 전문-


이처럼 그가 창조해 낸 '아직'이란 매혹적인 시는 감탄에 앞서 감동을 자아내는 예언적이고도 주술적인 시간과 공간을 흔드는 말이다. 상상력의 깊이와 시 읽기의 즐거움은 바로 여기 있다. 그가 설정하고 적가림한 구원 의지로 구경적인 삶을 노래한 시, 이 한 편을 남겨 두면서 온전한 삶이 기쁨으로 넘쳐 흐르기를 기대한다. 시 한 줄이 천억보다 더 소중하다고 대연각 호텔을 기증하고 간 백석의 애인 자야의 말을 더 보태주고 싶다. (끝)


주)

지금은 고인이 된 한국 서정 시인의 거장 송수권 시 평설 중에서 나의 시에 대한 부분을 발췌해서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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