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여기 수험 생활 1년 추가요

낙방의 고배를 마시다

by 구선생

떨어졌다.


1년 간의 노력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면접에서 그리 잘한 것 같지 않다고는 생각했지만, 정말로 떨어졌을 줄이야. 머릿속으로 막연히 불합격을 예상하는 것과 실제로 불합격 통보를 받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떨리는 손으로 몇 번이나 내 이름과 수험번호를 입력해 보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5가지 단계’라는 것이 있다. 사람이 시한부 선고를 받으면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의 5단계를 거쳐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이론이다. 이는 비단 죽음뿐만 아니라 받아들이기 힘든 모든 일들에 적용되는 것 같다.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라는 무정한 문구를 마주한 순간 내 심정도 정확히 그랬으니까.




불합격을 받아들이는 5가지 단계

1. 부정: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수험번호 입력을 잘못 한건가? 다시 한 번 해 봐야지.

2. 분노: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고? 말도 안 돼, 나를 떨어뜨린 근거를 대 봐!

3. 협상: 이번에 합격할 수만 있다면 2년 동안 영혼을 갈아서 공부할텐데. 어쩌면 합격한 누군가가 합격 취소를 할 수도 있어. 그러면 내 자리가 생길 지도 몰라.

4. 우울: 1년 동안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데…다 헛수고였나…

5. 수용: 그래, 내 실력이 조금 부족했나 보지. 이참에 1년만 더 해보지 뭐!




10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5단계를 거치며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탄 나는 결국 불합격을 겸허히 수용하고 한 번 더 도전하기로 했다. 평소에 대체로 우울한 상태인 데다 한 번 우울한 일을 겪으면 후유증이 오래 가는 나였지만, 불합격을 통보받은 날에는 이상하게도 회복이 빨랐던 것 같다. 불합격이라는 글자를 두 눈으로 확인한 뒤 우울해하는 것도 잠시, 금세 재수 결심을 하고 마음을 다잡았으니 말이다.


학원에서 매일 붙어다니며 공부하던 언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 언니는 학원에서, 나는 집에서 각각 불합격을 확인했다. 서로의 불합격을 알게 된 우리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깔깔 웃으며 ‘나 떨어졌어~~’라는 말을 반복했다. 둘 중 한 명만 합격했다면 적잖이 속이 쓰렸을 텐데 둘 다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나니 오히려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한참을 깔깔거리다가 전화를 끊었다.


다른 언니에게도 전화가 왔다. 나와 일 대 일로 스터디(조를 짜서 공부하는 것)를 하던 언니였는데, 매주 수요일마다 만나서 함께 공부하고 서로를 격려해 주던 끈끈한 관계였다. 언니는 합격, 나는 불합격이었다. 언니는 내 불합격 소식을 듣고는 전화기 너머에서 울먹거렸다. 나는 웃으며 괜찮다고 언니를 위로했다. 떨어진 건 나인데 위로를 건네는 쪽도 나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친하게 지내던 언니가 합격해서 마음이 놓였다. 나만 떨어졌다는 사실에 속이 쓰리기는 했지만 언니의 후배가 되면 된다는 생각을 하자 다시 웃을 수 있었다.


“안 울었어? 우리 딸 씩씩하네.”


집 앞 스타벅스로 향하는 길에 엄마가 대견하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엄마 말대로 그 날 나는 유달리 씩씩하고 회복도 빨랐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멘탈이 강한 사람처럼 말이다. 충격을 받은 나머지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린 것이 아니라 실제로 괜찮았다. 그 날 내가 왜 괜찮았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하긴, 그것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중요한 건 내게 1년이라는 수험 생활이 추가되었다는 사실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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