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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선생 Aug 31. 2020

왠지 처지는 날

데친 시금치의 넋두리

오늘은 왠지 아침부터 축축 처졌다. 물론 아침에는 일을 하기 싫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처지지만 오늘치 번역을 하다 보면 다시 활기를 되찾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오늘은 번역을 할 때만 반짝 기운이 나고 그 이외의 시간은 축 처진 채 보냈다. 우울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운 채 인스타와 유튜브만 뒤적거리다가 내가 처지는 이유에 대해서 글이라도 써봐야겠다 싶어서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내가 오늘 처지는 이유>  


커피

그저께와 어제 이틀 연속 커피를 마셨다. 나는 카페인이 안 받는 체질이라 하루에 한 잔만 마셔도 하루 종일 가슴이 쿵쾅거리고 얼굴에 열이 오르고 흥분 상태가 밤까지 지속된다. 카페인 기운 때문에 밤에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잠든다. 그래서 커피를 마신 다음날이면 피로와 수면 부족으로 헤롱거린다. 그런 커피를 이틀 내리 마셨으니 기운이 안 빠지고 배기겠는가. 덕분에 나는 오늘 오후에 두 시간이나 낮잠을 잤다. 그것도 얕은 꿈에 시달리면서 엄청나게 불편한 상태로. 그렇게 자고 나니 오히려 더 피곤한 느낌이 들어서 잠에서 깬 후에도 한동안 침대에서 뭉개고 있었다.


일감

나는 화장품 광고 문구 번역 회사에서 주는 일감을 받아서 일하고 있다. 보통 하루에 한두 건 정도의 작업 문의가 들어오는데, 가끔은 한 건도 들어오지 않는 날도 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화장품 광고 번역은 큰 돈이 되지는 않지만 소액의 번역료를 차곡차곡 모으는 맛과 중국어 광고를 창의성을 발휘해 한국어로 바꾸는 재미가 있어 내 생활에 많은 활력을 주는 일감이다. 실제로 화장품 광고 번역 의뢰가 들어오느냐 마느냐에 따라 나의 그날 컨디션이 갈리는 편이다. 어떤 날은 몸살이 나서 끙끙 앓다가도 의뢰가 들어와서 일을 하다 보니 몸이 저절로 나은 적도 있다. 하지만 오늘은 의뢰가 들어오지 않아서 심심하고 적적한 오후를 보내야 했다. 어차피 남는 시간에 하는 일도 없는데 돈마저 못 벌었다는 생각에 자책감이 밀려오는 하루였다.   


입금

이번에도 화장품 광고 회사와 관련된 이야기다. 이 회사는 매달 말일에 입금을 해주는데 이상하게도 오늘 입금이 되지 않았다. 지난달 말일에는 오후 12시가 되기도 전에 입금이 되었는데 이번에는 저녁 6시가 다 되어가는데도 어째 소식이 없다. 이번에 받을 금액은 (내 기준에서) 꽤 큰 금액이라 더 걱정이 된다. 문제는 이 회사가 다국적 회사라 본사에 문의를 하려면 짧은 영어를 써야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지난번에도 인보이스 보내는 법과 주문을 수락하는 법을 잘 몰라서 본사에 연락하고 발을 동동 굴렀었는데 그 악몽이 다시 재현되는 것 같아서 끔찍하다. 이번에는 아무 문제 없이 인보이스도 잘 보내고 꼼꼼히 체크했는데 왜 돈이 안 들어오는지 모르겠다. 내일 회사에 연락해볼 생각인데, 이런 일로 연락하는 것 자체가 내게는 큰 스트레스다. 그래서 나는 지금 돈을 받지 못한 슬픔과 더불어 연락의 부담까지 짊어지고 있다. 


전자책

대학원 동기와 대화를 하던 도중 동기가 낸 아이디어에 영감을 받아 전자책을 내보기로 했다. 수입이 불안정해 안정적이고 꾸준하고 자동적인 수입에 혈안이 되어 있는 내게는 정말 좋은 아이디어였다. 부리나케 인터뷰 대상을 모집하고 인터뷰를 진행하고 인터뷰 내용을 편집하고 표지를 장식할 손그림까지 그린 뒤 요즘 뜨는 전자책 판매 플랫폼 두 곳에 판매 신청을 냈다. 전자책은 그냥 등록해서 팔면 되는 건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플랫폼의 승인을 받기 위해 기획의도를 포함한 꽤 자세한 설명을 써서 제출해야 했다. 세상 만사 정말 쉬운 것이 없다. 어쨌든 있는 말 없는 말 지어내서 쓰고 제출한 뒤 승인을 기다렸는데 오늘 한 플랫폼에서 내 전자책이 반려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힘이 쭉 빠지는 순간이었다. 반려 사유를 참고해 다시 승인 신청을 했다. 결과는 9월 7일에 나온다고 한다. 그 때까지 또 어떻게 기다리지, 막막한 심정이다.


공부

요즘 번역 속도가 빨라져서 하루에 정한 분량을 하고 나면 오후나 저녁 시간이 통으로 남는다. 그 시간에 생산적인 뭔가를 하고 싶은데 막상 일이 끝나면 축 처져서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사람이 이렇게 간사하다. 별 보람 없이 하루의 끝을 맞으면서 다음 날부터는 독서, 운동, 외국어 공부 등을 꾸준히 하겠다는 거창한 목표를 세워 보지만 결국 남는 것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채 쓸데 없는 인스타 피드나 훑어보고 있는 내 모습이다. 이런 패턴이 반복되면서 무력감과 가벼운 우울감이 마음 속에 똬리를 틀게 되었다. 난 도대체 남는 시간에 뭘 해야 좋을까. 


정리해놓고 보니 오늘 축 처졌던 이유가 꽤나 많다. 앞으로는 기운이 없고 축 처질 때마다 이렇게 자기 분석형 리포트를 써 봐야겠다. 리포트를 쓰는 동안 잠깐이었지만 눈이 반짝거리며 온몸에 힘이 솟는 경험을 했다. 역시 글쓰기의 힘은 위대해. 그나저나,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이젠 뭘 하나.       





이미지 출처: https://all-that-review.tistory.com/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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