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학원에 등록을 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열심히 공부해서 통번역대학원에 들어가는 것 뿐이었다. 내가 등록한 반은 중국어 뉴스를 공부하는 반이었다. 하루에 뉴스 한두 개 정도를 공부하는 게 전부였지만, 그것마저도 내게는 힘에 부쳤다. 모르는 단어가 어찌나 많은지 정리를 해도 해도 끝이 없었고, 수업 시간에 중국어 원문을 읽어 보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식은땀만 뻘뻘 흘렸다. 뉴스처럼 어려운 텍스트를 접해본 적이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막막해 할 틈도 없이 공부를 시작했다. 어떻게 해서든 중국어 뉴스와 친해져야 했다. 집에서 놀던 A4공책이 출동할 시간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공책 한 쪽에 수업시간에 받은 텍스트를 붙였다. 다른 한 쪽에는 그 텍스트에 나온 단어와 표현을 빽빽하게 정리했다. 익숙해질 때까지 텍스트를 낭독하고, 한국어로 해석하고, 한국어 해석을 옆에 적어 보았다. 한 텍스트당 적어도 다섯 번은 봤던 것 같다.
내게 중국어 뉴스는 사골뼈였다. 겉으로는 딱딱해 보일지라도 어떻게 해서든 그걸 보글보글 끓여서 필요한 영양분들을 우려내 남김없이 쪽쪽 빨아먹어야 했다. 열심히 해서 윗반으로 올라가면 하루에 자료를 열 장 씩은 준다고 했다. 그러니 한두 개의 텍스트를 뼛속까지 빨아먹는 ‘사골 공부법’을 실천할 수 있는 시간은 지금밖에 없었다.
사골 공부법: 더 이상 빨아먹을 데가 없을 때까지 빨아 먹는다.
수업이 끝나면 학원 복도에 배치된 책상에 앉아 공책에 맞게 자료를 오리고 풀칠해서 예쁘게 붙였다. 그리고는 사골 우리기를 시작했다. 표현이 눈에, 귀에, 입에 익을 때까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았다. 공부를 마치고 시계를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리를 정리한 뒤 학원을 나섰다.
학원에 등록한 첫날은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12월 말의 어느 날이었다. 원래 공부도 운동도 새해 첫날부터 하는 거라던데, 12월 말부터 학원에 등록한 것을 보니 급하긴 급했나 보다.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휴강을 하는 마법같은 일은 없었으니 12월 24일에도 평소처럼 학원에 가서 수업을 듣고 남아서 복습을 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본격적인 연말이 되었다. 연말 특유의 들뜬 분위기가 학원 안에도 가득했고, 수업이 끝나자 학생들은 연말 계획으로 부푼 가슴을 안고 집으로 향했다.
나야 크리스마스고, 연말 약속이고 없었으니 그냥 학원에 남았다. 학원 복도의 지정석에 앉아서 평소처럼 가위질과 풀칠을 하고 있자니 왠지 서글퍼졌다. 연말에 약속이 없는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니었지만, 오늘 따라 아무도 나를 불러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슬펐다. 어쩌면 이제부터 누군가와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혼자 남아 공부해야 하는 날이 훨씬 더 많아질 것이라는 예감 때문에 슬퍼진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침울해졌고, 어수선한 학원 분위기에 휩쓸려 그날은 일찍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길, 고등학교 친구들끼리 있는 단톡방 알림이 떴다.
“구선생 집에 케이크 7호짜리 있대.”
“오…...먹으러 오라는 거니?”
“구선생이 이미 먹고 있을 걸?”
“젠장.”
친구들의 대화를 보고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와글거리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했다. 휴대폰 액정 너머로 저마다의 일에 몰두하고 있을 친구들을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친구들이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앞으로 몇 개월이 걸릴지 모르는 공부를 하느라 힘들겠지만, 우리가 있으니 힘 내! 알겠어, 힘 낼게. 나는 마음 속으로 대답하고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