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의 시간

퇴근 후 직장인의 고뇌

by 구선생

탈진.

퇴근한 직장인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 중 이것보다 적절한 단어가 있을까.


탈진은 했지만 난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

하루종일 모니터와 눈싸움을 하고 잔뜩 핏발이 선 눈으로 다시 컴퓨터 앞에 앉는다.

이렇게 말하니까 퇴근 후에도 투잡 뛰는, 꽤나 부지런한 직장인이라도 된 것 같은데

사실은 프리랜서 시절 맡았던 일감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바람에

마무리될 때까지 울며 겨자먹기로 일하고 있는 것뿐이다.


나는 제 무게에 못 이겨 반쯤 감긴 눈을 한 채 생각한다.

9시부터 6시까지 직장 다니면서 저녁에 자기계발하거나 부업하는 게 물리적으로 가능한 건가?

퇴근하고 나면 이렇게나 피곤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아침의 정기를 받은 내 신선한 체력과 정신력은 전부 회사에 기증하고 왔는데?


또, 주중에 다이어트 하는 게 과연 가능키나 한 건가?

오늘은 운이 좋아 용케 저녁에 간식을 안 먹고 넘어가긴 했지만

유난히 힘든 날에는 보상심리 때문에 날이 어두워질 수록 식욕이 날뛰는데?

아무리 '오늘부터는 정말 제대로 해보겠다'고 아침에 굳은 결심을 했어도

속이나 마음이 조금만 허하면 바로 뭐라도 채워넣어야겠다는 강박에 가까운 충동이 드는데?


눈꺼풀은 더 무거워지고, 나는 보다 근원적인 물음에 빠져든다.

직장 다니면서 꾸준히 자기계발에 운동하고 식단관리까지 하는 사람은

그만큼 의지가 강한 인간인가, 아니면 자기관리 자체를 즐기는 별종인가,

아니면 애초에 나랑 아예 다른 종족인가?


겨우 본업만 잘해서는(딱히 잘하지도 않지만) 남들 발끝 따라가기도 힘든 세상에

잘못 무친 시금치처럼 축 처진 몸으로 퇴근해 이것저것 하려고 시도하다가

결국 감기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휴대폰을 쥐고 벌렁 누워버리는 나 자신은

너무 쉽게 나 자신이 미워하고 한심해하는 상대가 된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어려워하는 것 중 하나는

나 자신을 미워하거나 한심한 눈초리로 쳐다보지 않고

소중한 존재를 대하듯이 너그럽게 안아주는 행위다.


하지만 운동도 하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겠다는 퇴근 후의 원대한 계획을

매번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리는 나를 미워하지 않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효율과 생산성을 목 놓아 외치는 가혹한 자아와

러브유어셀프를 미약하게 외치는 관대한 자아가 본격적으로 불화하는 시간.

꿈은 크지만 체력과 의지는 소박한 직장인의 퇴근 후 시간은 대체로 이런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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