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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ㅎㅈ Jul 13. 2023

벽을 무너뜨리는 길 위의 다정함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있는 중 - 1편

산티아고를 왜 갔냐 물으면 사실 잘 모르겠다. 왜 왔지? 종교도 믿음도 없다. 뭔가를 이루고 싶다는 거창한 마음도 없다. 그냥 걷는 걸 좋아하니까? 아무 생각 없이 걸을 수 있다길래, 그런데 그곳이 마침 유럽이라길래. 처음엔 J와 신혼여행으로 산티아고를 걷자고 했었다. 그러다 어째 저째 타이밍이 맞아 지금 우리는 산티아고 포르투갈 길 한가운데에 있다.


첫 날인 오늘은 약 7시간 가까이, 30km 가까이 걸었다. 평소 서울에서도 20km 가까이는 거뜬하게 걷는 우리라 엄청나게 힘들진 않지만, 그래도 10kg이 되는 배낭을 이고 지고 걷는 건 다르다. 정말로 순례자가 했을 법하게 새벽부터 일어나 짐을 싸고 최소한의 아침 식사만 한 채 걸었다. 물론 우리가 일찍 일어난 이유는 한낮에 걸으면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순례자들이 묵는 숙소인 알베르게에 도착하고선 당연히 슈퍼벅 맥주부터 깠다. 왠지 술례자의 길이 될 거 같은 강한 예감과 함께.


순례자들(?)은 동일한 길을 걷기 때문에 보폭이나 쉼의 정도에 따라 조금의 차이만 있지 웬만하면 오며 가며 계속 마주친다. 누구라도 만나면 부엔 까미노!*를 즐겁게 외쳐 주어야지 마음먹었지만 어째 마주치는 사람들이 하나 없다. 산티아고 포르투갈 길은 스페인 길에 비해 사람이 적다더니 그래서 그런가. 조용히 떠오르는 해를 보며 서로 앞을 보며 묵묵히 걸을 뿐이었다. 그런데 포르투의 제법 도시스런 모습을 벗어나기 전 갑자기 뒤에서 불쑥 누군가 말을 건다.

*좋은 길이라는 뜻으로 순례자들이 서로의 축복을 빌어주는 인사말


중국 무술 영화에 나올 것처럼 한쪽 팔에 기다란 나무 막대를 낀 못해도 한.. 70은 먹었을 거 같은 아저씨가 우리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스페인어로 다다다다 말을 걸어왔다. 우리 스페인어 못한다고 영어로 외쳐 봤지만 아저씨 또한 영어를 못하는지 우리 말엔 대답 않고 계속해서 스페인어로만 말한다. 아저씨는.. 가히 집요했다. 우리가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해도 계속해서 짧은 스페인어 단어들로 우릴 이해시키려 했다. 영어 외엔 라틴어에 뿌리 둔 언어를 하나도 할 줄 모르는 우리는 눈치조차 챌 수 없다.


기어코 내가 꺼낸 최후의 수단. 그것은 바로 번역 앱. 마이크 권한 설정을 준 후 그에게 말해 보라며 입 근처에 휴대폰을 갖다 댔더니 이 아저씨, 한 번에 거의 스무 문장을 넘게 말한다. 혼자 오래 걸어 외로우셨던 건지 아니면 그저 말이 많은 스페인 아저씨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번역기 앱에 한국어로 뜬 아저씨의 말은 참 다정했다. 리스본에서부터 걸었다던 아저씨는 우리에게 이것저것 팁을 알려 주었다. 그러고선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며 자신만의 보폭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또 우연히 마주치면 그다음 팁을 전해 주었다. ‘숙소는 여기가 좋으니 전화 걸어 예약을 해보렴’, ‘아직 이만큼이나 남았으니 이 마을 근처에서 배고프면 간단하게 식사를 하렴’. 번역 앱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고 긴 문장을 듣고도 기가 막히게 번역을 또 해준다.


아저씨의 다정한 조언에 연신 그라시아스만 외쳤다. 생각해 보니 스페인어는 아는 게 정말 없다. 올라, 그라시아스를 빼면 데스페라도스나 콴도 같은 노래 가사에서나 대충 배워 아는 단어뿐. 아 어차피 다른 언어 배울 거 영어랑 같은 뿌리에 있는 언어나 배울걸. 뭐한다고 한자도 다르고 어순도 달라 곧 때려 칠 중국어나 했담. 갑자기 한국에 돌아가면 스페인어를 공부해야겠다는 또 의미 없는 계획만 세운다.


알베르게에 도착한 후 샤워를 하고 간단히 동네 구경을 하는데 저 멀리서 갑자기 누군가 또 소리치며 우릴 붙잡는다. 또 아저씨다. 옆엔 알베르게에서 만난 다른 두 명의 스페인 청년들도 있다. 함께 밥 먹으러 갈 건데 너네도 갈래? 오는 길에 점심을 먹어 배부르다 하니 그럼 6시 반쯤에 저녁을 함께 먹자고, 그렇게 약속을 잡았다. 물론 이 모두 번역 앱으로 해냈다. 아저씨의 다정함이 문명의 벽을 이겼다.


가끔 영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을 대할 때 난 쉽게 소통을 포기한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대충 자기네 언어로 말 걸다가도 내가 영어로만 답하면 보통은 그 특유의 표정 - 언어적 배웅의 표정.. 을 지으며 나를 놓아준다. 그런데 오늘 하루 만난 이 아저씨를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이 아저씨의 집요한 다정함. 서로 벽을 보고 말하는 것처럼 한 마디, 한 단어조차 통하지 않을지언정 같은 길을 걷는 사람에게 아저씨는 계속해서 말을 건다. 우린 같은 방향을 보고 같은 이유로 걷고 있으니까? 아저씨는 그것의 힘을 믿는 걸까? 이제 첫날. 남은 다정할 나날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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