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ㅎㅈ Jul 30. 2023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있는 중 -  2편


같이 들으면서 읽기~


산티아고 순례길 첫날. 어디선가 불쑥 갑자기 튀어나와 우리에게 말을 걸던 스페인 아저씨는 산티아고 n회차 중이었던 이른바 고수였다. 모든 게 어리바리하던 우리에게 숙소를 예약했냐고, 정확히는 구글 번역기가 우리에게 물어봤다. 알베르게는 원래 예약이 안 된다고 알고 있어 무작정 오늘의 목적지로 바삐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는데, 아저씨는 핸드폰 사진첩에서 직접 찍은 숙소 전단지를 내밀며 여길 예약 하란다.


- 예약 안 된다며?

- 몰라 일단 하라니까 해봐


e심을 사 왔으면 큰일 날 뻔했다. 다행히 유심을 산 덕에 유선 통화가 가능했고 아저씨가 내민 숙소 전단지 속 번호로 전화를 걸어 숙소를 예약했다. 그러더니 아저씨는 다시 쿨하게 (번역기를 통해) ’우리 언젠간 다시 만날 거야‘ 라더니 만화 주인공처럼 커다란 나무 봉을 양 어깨에 끼고 유유히 앞서 걸어 나갔다. 키가 커서 그런가, 걸음이 되게 빠르네. 나도 한국에서 한 걸음 하는데 좀체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순례길 코스에서 큼지막한 도시에는 여러 종류의 숙소가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게 공식 또는 공용 알베르게(public)다. 순례자들을 위해 아주 저렴한 가격에 제공되는 숙소인데 대신 여러 명이 한 방에서 자는 형태로, 쉽게 말해 호스텔의 혼성 도미토리 같은 형태이다. 여러 순례자들이 모이는 도시에 공용 알베르게는 보통 한 개, 많아 봤자 두 개 정도로 보통은 예약을 따로 받지 않으며 온 순서대로 들어가는 그런 시스템. 그 외에 일반적인 형태의 호스텔, 호텔, 민박 등 다양한 사설 숙소가 있으며 개인의 선호에 따라 골라 묵을 수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첫날 묵은 도시가 너무 작아 따로 사설 알베르게가 없었다. 공용 알베르게 두 개만 있다 보니 예외적으로 예약을 받은 건지, 게다가 다른 공용 알베르게들과 조금 다르게 도미토리 방 외 두 명을 위한 프라이빗 룸이 따로 있어 운 좋게 그 방을 예약해 편하게 잘 수 있었다. 생각보다 좋은 숙소 퀄리티에 기분이 좋아 상쾌하게 샤워하고 맥주를 딱 까는데 저기서 커다란 스페인 아저씨가 또 불쑥 나타나더니 ‘깜삐오네! 꼬레아노!*’를 계속 외치며 엄지를 계속 올린다.


*하도 깜삐오네인지 깜빠오네인지 우릴 볼 때마다 말하길래 찾아보니 스페인어로 챔피언이라는 뜻이었다.


이 작은 숙소에 우리와 스페인 아저씨 말고도 스페인 청년 두 명이 각각 더 왔다. 한 명은 우리가 맥주를 마시는 그늘 옆에 앉아 말없이 자기 핸드폰만 바라봤고 한 명은 왼쪽에 앉아 빨래를 하며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주로 어디서 왔냐, 어디서부터 걸었냐, 괜찮냐를 물었고, 우리는 이미 몇 번 산티아고를 걸은 적 있다던 그에게 왜 또 걷는 걸 결심했냐 따위를 물었다. 유럽의 해가 뜨겁게 내리쬐던 오후 2시 즈음. 당시엔 그 순간이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스페인 사람들과 저녁 약속을 하고서도 너무 피곤해 해가 지는 걸 보지도 못하고 그늘 진 방의 차갑고 건조한 공기를 이불 삼아 잠에 들기 시작했다. 잠에 옅게 들 즈음 열어 둔 방 창문 밖으로 누군가 알베르게에 또 들어오고... 주인아저씨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텍사스에서 왔다고... 특유의 악센트로 이야기하던 누군가의 대화를 끝으로 나는 까무룩 잠에 빠지고 말았다. 얼굴도 모를 누군가, 그저 끝까지 얼굴을 모를 누군가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지금에 와 생각하면 스페인 청년 중 한 명인 Cesar의 표현을 빌려 이 순간을 ‘LEGEND'라 말하고 싶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한 마지막 날, 함께 찍은 사진에는 이 첫날에 만난 모든 사람이 있다. 사진에 없고 얼굴을 본 적도 없는 텍사스 친구마저도 순례길 도중 만나 실없는 대화들을 나눴다. 정말 모든 게 별 거 아니라 생각했는데, 도착하고서도 별 감흥 없다 생각했는데 아직까지도 그 사진들을 꺼내보며 첫날 만남의 대수로움을 되새긴다. 우리가 이렇게 2주 가까이 그 긴 길을 함께 할 줄 알았을까. 동지애와 더불어 아련함과 왠지 모를 가슴이 뻐근해지는, 이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끼게 될 줄 알았을까.


스페인 아저씨는 헤수스, 영어론 Jesus라는 산티아고에서 실로 경이로운 이름을 가졌으며 스페인어‘만’ 할 줄 아는 60대 중반의 아저씨임에도 산티아고의 모든 사람을 잡아당기는 인싸였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에게 말을 걸고 무언갈 함께 하자고 제안하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첫날 알베르게에서 우리에게 말을 걸던 씨저는 순례길 내내 전혀 말이 통하지 않던 우리와 헤수스 사이 구글 번역기가 됐다. 말을 하지 않고 옆에서 휴대폰만 보던 스페인 친구 한 명은 알고 보니 세상 말이 많던 동갑내기 친구였고 많고 빠른 말만큼이나 발걸음도 무지 빨랐다. 이들은 ’charge'를 해야겠다면서도 스페인어를 못하던 우리와 다른 친구들과 헤수스 사이 말을 계속해서 통역해 줬다. 착하고 다정한 사람들.


둘째 날, 산티아고 포르투갈 길에선 흔치 않은 동양인 아저씨 한 명이 헤수스 아저씨와 동행하는 걸 보고 한국인인가 했더니 일본인이었다. 일본인 오시마 씨는.. 무지 동안이었다. 알고 보니 아저씨가 아니라 나이가 일흔 일곱 살인 할아버지였다. 우리 아빠가 혼자서 이 길을 걷는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데 아빠보다 10살도 넘게 많은 할아버지가 이 길을 혼자 걷고 있다. 심지어 영어도 스페인어도 할 줄 모른다. 휴대용 번역기 하나 들고서 이 긴 길을 홀로 걷고 있다. 30대인 우리가 걸어도 힘든 길이 여든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에겐 어떤 길일까. 우연히 길에서 마주칠 때마다 다리를 절룩거리는 오시마 씨를 볼 때마다 마음이 쓰였다. 나만 그랬던 게 아니었는지 그가 마지막 날 즈음해 번역기를 잃어버려 그나마의 대화도 모두 할 수 없게 됐을 때 모두가 안타까운 마음에 달려들어 기차 시간표를 알아봐 주고 식사를 챙겨주었다.


모든 사람들이 에슬레져 룩이나 나처럼 거렁뱅이 룩을 하고 주로 걷는 산티아고 길에서 언제나 꼿꼿하게 흰 린넨 셔츠를 입고 걷던 한 멋쟁이 독일인 아저씨는 자리가 없다며 함께 점심을 먹어도 되겠냐 물었다. 언어의 장벽 때문에 별 다른 대화 없이 피상적인 얘기만 하겠거니 했던 그 점심 식사는 순례길 통틀어 최고의 수다였다. 독일인 아저씨의 이름은 베른으로 유럽의 나사라 일컬어지는 유럽 우주국에서 일하는 물리학자였다. 짧은 점심시간 동안 베른과 우리는 각자의 가족 이야기부터 결혼, 아이, 우리의 오래된 relationship, 서로의 문화, 양자역학(!)*까지 아주 길고 깊은 이야길 나눴다.


*양자역학이 요즘 한국에서 핫하다니 이해하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아니죠! 하고 님은요 물었더니 자기도 모른댄다. 물리학자도 모른다니 위안이 됐다.


취미가 사진이었던 베른 씨는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촬영하고 있으며 독일로 돌아가면 사진전을 열 거라며, 우리를 찍고 싶다고 했다. 그는 독일인답게 내내 재미없는 유머를 구사하며 혼자 많이 웃었는데, 사진 촬영을 제안하면서도 ‘나중에 너네가 헤어지든 계속 가든 사진을 남기고 싶다’며 실없는 농을 던졌다. 그의 프로젝트도 흥미로웠고 둘이 이런 식의 스냅을 찍어본 적도 없는 터라 흔쾌히 좋다고 응했다. 즐거운 대화와 페어링 된 술과 뜨겁게 내려 쬐는 유럽 햇살 덕에 사진을 찍히는 우리 둘이나 사진을 찍는 베른 씨나 얼굴이 벌큰해졌지만 셋다 상관하지 않았다. 꽤나 취기가 올라 괜히 카메라 앞에서 표정도 지어보고 활짝 웃으며 사진에 찍혔다.


고맙다며 합장을 하는 베른 씨에게 그건 한국에서 일반적이지 않다며 주로 고개를 숙인다고 일러 줬더니 신경이 계속 쓰였던 건지, 마지막 날 한 잔 하는 자리에서 혹시 자기가 ‘멍청한 짓’을 한 게 있으면 알려 달라고 조심스럽게 일러 왔다. 요는 우리가 문화권이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나이가 달라 자기가 혹시 실수한 게 있으면 편하게 말해달란 거였다. 아 전혀 없다며 너무 좋은 대화였다며, 혹시 did I? 라고 물었더니 손사래를 크게 친다. 혹시 그게 신경 쓰였던 거면 전혀 안 써도 된다며, 그저 베른 씨 말마따나 서로 다른 문화권의 이야기를 한 것뿐이라고 하니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표정이다. 만나 본 어른 중 가장 세심한 어른이었다.




아직 내 정체성에서 20대를 지우지 못하고 스스로를 자꾸만 제 나이보다 어리게 여기는 이상한 습관이 있는 나는 그래서 그런지 동갑인 친구들이 두어 명 있었음에도 왠지 순례길엔 주로 나이가 좀 있는 어른들이 오는 것처럼 느꼈다. 실제로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대부분이 어른이었고 우리보다 더 어린 사람들은 좀체 보기 쉽지 않았다. 한국의 내 일상에선 어른들을 만나기 쉽지 않다. 나이 차이가 위로 꽤 나는 친구도 없고 회사도 젊은 편이라 상사들이 모두 비슷한 세대다. 이 좁고 좁은 삶의 영역! 어른이라 해봤자 가족 친척이 다인데다 그마저도 고향을 떠나 독립한 지 오래라 주변에 딱히 어른이 없다. 어른이 없으니 좋은 어른도 없다. 순례길을 떠나기 전에는 주로 또래인 한국인들끼리 모여 친해질 줄 알았는데, 공교롭게도 이번 길에선 좋은 어른들을 많이 만났다.


영어도, 스페인어도, 일본어도 하나도 통하지 않는데 어떻게 헤수스와 오시마 씨가 같이 다니냐 묻는 내게 베른 씨는 ‘마음으로 대화하는 것‘이라는, 어떻게 보면 너무 뻔하고 재미없는 대답을 내놨다. 순례길 5일 차이던 그때만 해도 내겐 답이 될 수 없는 대답이었다. 그렇지만 마지막 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해 배낭을 던지고 신발을 벗고 함께 맨바닥에 누워 성당 위를 바라보던 그때, 다시 사진을 문득문득 꺼내 보는 지금, 어쩌면 그게 내겐 답이 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산티아고를 걷는 사람마다 똑같이 묻는 게 있었다. 다시 또 걸을 거냐고. 주로 그들은 여러 번 걸어 본 사람들이었고, 나는 농담에 진담을 아주 진하게 섞어 ’maybe 10 years later?' 이라고 답했다. 다시 걷지 않겠다는 게 진담이고 아마 10년 뒤쯤? 이 농담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인간은 고통을 결국 망각해서인가, 고새 미화가 된 걸까, 아님 정말로 내 마음이 그런 걸까. 10년이 채 지나가기 전에 또다시 그 길을 걸을 수 있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타투 또 하면 안 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