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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ㅎㅈ May 13. 2024

오래된 친구의 편지

미국으로 이민 간 오래된 친구가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와 함께 밥을 먹었다. 친구의 가방엔 낯익은 한국 여권이 아닌 미국 여권이 있다. 미국인과 결혼한 친구의 성은 남편의 성이다. 미국 여권도, 황에서 장으로 바뀌어 버린 성도 모든 게 낯설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기분이 묘하다.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해 너무 미안하다며 헤어질 때 친구가 결혼 선물과 함께 손 편지를 쥐어줬다. 나는 편지를 받으면 굉장히 궁금해하는 사람이라 선물 뜯기 전 어린아이처럼 참지 못한다. 참지 못하지만 그 짧은 시간 내 갖는 기대감과 설렘이 너무 간질 하여 가끔은 스스로 미룬다. 충분히 행복해진다.


친구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혼자가 되자마자 바로 편지 봉투를 뜯었다. 내용은 산뜻했다. 친구답게 간결했다. 비가 오기 며칠 전처럼 살짝 습한 기운이 내려앉은 밤공기를 맡았다. 걷기 좋은 날씨다. 집 근처 세차장을 지나는데 갑자기 세제 냄새가 훅 끼쳤다. 고등학생 기숙사 화장실의 방향제와 같은 냄새다. 친구 편지의 마지막 글자는 “오래된 친구”였다.


그 시절 우리는 쉬지 않고 떠들었다. 눅눅한 여름밤공기를 맡으며 기숙사 주변을 걷고, 같은 방 침대에 누워 남자 이야기를 했다. 공부를 마치면 칫솔에 치약을 묻혀 함께 화장실로 가 양치했다. 갱지로 만든 논술 답안지를 찢어 뒷면에 편지를 쓰고 나눴다. 가끔은 복도에서 전속력으로 뛰고 방귀를 뀌고 춤을 췄다. 심야자습실에서 공부하다 발가락으로 서로의 발을 꼬집었다.


시간은 그로부터 무려 17년이 더 지났지만 만나기만 하면 그 시간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남자 이야기에서 다른 이야기들로 주제는 바뀌었지만 왠지 기숙사 침대에 누워 수다를 떠는 것만 같다. 오래된 추억에서 모든 것들이 밀려왔다. 목이 무거워지더니 결국 눈가까지 묵직해진다. 결국 조금 울고 말았다. 오래된 친구는, 우리의 오래된 시간은 너무 강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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