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알고 보면 모두 다른 날들
4. 외로워서 그러는 거야
훌륭한 가문을 이루는 것을 꿈꾼 이도 있었다. 자신은 장남이고, 중고등학교 시절 집을 떠나 도시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타향살이 하며 외로웠을 터, 장남이라는 자리는 특권인 동시에 책임감이었다. 하지만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많은 것이 달랐다. 시대는 변했고, 사람들은 더 이상 옛날처럼 살지 않았다. 대문 앞에 멋스런 문장을 걸겠다는 꿈도 세월 따라 빛이 바랬다. “아버지를 마지막까지 모셨어요. 아버지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모든 재산을 저에게 주고 싶어 하셨지만, 어디 그럴 수 있나요. 동생들과 똑같이 나눴어요. 그런데 지금도 만나면 서먹해요. 많이 아쉬워요. 어떻게 하면 더 좋아질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관이 내려갈 때 나는 비로소 내 여동생들의 ‘오빠’라는 운명에 두렵고도 버거운 충만감을 느꼈다. 나는 가부장의 아들로 태어난 가부장이었던 것이다. ‘오빠’라는 호칭은 지금도 나에게 두렵고 버겁다.
- 김훈, 〈광야를 달리는 말〉, 《라면을 끓이며》, 문학동네, 2015, 29쪽
요즘 시대에 ‘가부장’이라는 말은 너무 권위적이고 구태의연해서 좋은 뜻으로 쓰기 어렵다. 더군다나 중년 남성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사적 장소뿐 아니라, 길거리, 지하철 같은 공적 장소에서도 자주 문제가 된다. 머리 희끗한 남성이 새치기를 하거나 공공장소에서 막무가내로 소리를 지르고, 지하철에서는 임산부석으로 표시된 분홍색 의자에 당당하게 앉아있다. 그런 이야기를 주위에서 듣거나 뉴스를 통해 보면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렇다면 ‘가부장’으로 태어나 ‘가부장’으로 자란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그것은 아마 외로운 탓이다. 자신이 태어난 한국과 늙고 난 뒤의 세상이 너무 달라 길을 잃은 것. 자신이 자랄 때는 쉰이 넘으면 응당 어른 대접을 받고, 어른에게 기꺼이 장유유서라며 예우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예순에 가까워오니 ‘가부장’은 옛말이고, 모두 동등한 세상이란다. 조금은 억울할 것도 같다. 부모를 모시는 일은 여전히 장남의 몫인데, 재산은 똑같이 나눠야 한다는 생각은 정말 공평한 것일까. 별로 의심해 본 적 없는 요즘 생각에 작은 균열이 일었다. 북콘서트를 통해 한 ‘가부장’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스스로 닿기 힘들었을 부분이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내 아버지 이야기이기도 하고, 언젠가 나의 남편이 갈 자리이기도 하다. 조심스럽게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