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먹은 손

2020.02.10. 윤진현 《고릴라 할머니》 2

by 윤혜린

할머니 한 분 한 분 이름을 종이 가득 썼다. 책을 읽고, 자신의 이름을 꾸미는 활동을 했다. “난 이런 거 못 해.” 할머니 몇 분이 자신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놓고 한참을 망설였다. 사회복지사가 “마음대로 칠해 보세요.”라며 북돋았지만, 색연필을 쥔 손이 불편해 보였다. 어쩌면 태어나 연필을 몇 번 쥐어본 적 없는 손인지도 몰랐다. “꽃도 그려볼까요?” 내가 말했더니 몇 분이 개나리, 코스모스, 나비를 그렸다. 하지만 몇 할머니의 손은 여전히 쭈뼛쭈뼛 갈피를 잡지 못 했다.

문득 내 왼손이 떠올랐다. 딸아이 다섯 살에 처음 이름을 썼을 때, 그 삐뚤빼뚤한 ‘ㄴ’과 ‘ㅏ’를 보면서 ‘내가 이만큼 글씨를 쓰기까지 꽤 많이 노력했구나’ 깨달았다. 8칸 공책에서 글자가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을 보며, 스케치북에서 팔다리 네 개 달린 벌레가 얼굴과 몸통이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걸 보며, 지금껏 내가 얼마나 쓰고, 그리고, 칠했을까 생각했다. 나의 오른손은 이제 모든 것에 제법 능숙하다. 그에 비해 쓰지 않은 왼손은 늘 제자리. 일흔 넘어 색연필을 처음 든 그 손도 내 왼손처럼 모든 것이 어색할 것이다.

할머니 한 분이 색칠을 다하고, 더 이상을 못한다며 손을 놓았다. 다가가 가운데 꽃수술을 그리고, 꽃잎 다섯 장을 더했다. 혹시 망칠까 조심조심 손이 떨렸다. “잘하네. 역시 돈 먹은 손은 달라.” 순간 내 눈이 동그래졌다. “돈 먹은 손이 뭐예요?” “이게 돈 먹은 손이지. 내 손은 돈을 못 먹어 봐서 이런 걸 못 해.” 다른 할머니가 말을 이었다. “내 손도 일만 하느라 돈 못 먹었지. 근데 우리 손녀가 홍대 들어갔잖아.” 두 할머니가 싱글싱글 웃었다.


“젊어서 잘했던 것 이야기 좀 해주세요.” 처음에는 없다며 손사래를 치던 할머니들이 쑥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청소하고 정리정돈은 잘해.” “나는 호미질 잘했지.” “나는 빨래 하나는 잘했어.” “나는 일이라는 일은 다 했어. 들로 산으로 안 가본 데가 없어.” 참 예뻤을 할머니들 모습이 그려졌다. “그때 일했던 게 다 몸에 독으로 남았어. 안 아픈 데가 없어.” 이 말에는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고릴라 할머니》 마지막 면지에는 분칠하고, 구두 신고, 양산 쓰고 나들이 가는 할머니가 나온다. 살결은 거뭇하고, 주름은 밭고랑 같지만 표정은 새색시처럼 들뜨고 설렌다. “할머니, 참 예뻐요.” 마음을 다해 말했다.


Photo by Max Berg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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