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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린 Jun 01. 2020

그리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3. 글은 나를 기억한다

  《엄마의 책장》이 책이 되어 온 날, 마음이 어수선했다. 어둑한 내 눈빛을 보고 남편이 물었다. “책 나오니까 안 좋아?”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러게…. 기쁘면서도 사람들이 공감할지, 책이 잘 팔릴지 걱정이 되네.” 남편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책 한 권 나왔다고 달라지는 거 없어.” 나도 피식 웃었다. “그건 당신을 봐서 알고 있죠.” 남편 또한 이미 책을 두 권 낸 작가이다. 책이 나와도 인생이 별로 달라지지 않음을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았다. 인생은 그렇게 단 번에 바뀔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북 콘서트를 했고, 지인들 부탁에 사인을 했다. (처음에 사인이 너무 이상해서 수십 번 연습을 했다.) 학교와 도서관에서 수업을 하고, 독서모임을 하고, 여전히 읽고 쓴다.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엄마의 책장》은 내 작은 생에 선물이 되었다. 글을 쓰는 것은 ‘나’를 쓰는 것이다. 현대사 옆에 내 삶을 작성했고, 덕분에 나를 더 잘 기억한다. 인생 전반부를 정리한 자서전을 쓴 셈이다. 1910년 하면 국권 피탈이 튀어나오듯, 2010년 하면 ‘뒤늦은 사춘기’ 같은 내 삶의 연표가 떠오른다. 두 아이 모두 개학을 하면, 어떤 글을 쓸까 고민했다. 소설, 실용서, 에세이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머릿속이 글로 가득했다. 하지만 개학은 연기되었고, 읽기도 쓰기도 점점 시들해졌다.    


  가끔 검색창에 ‘윤혜린, 《엄마의 책장》’을 쳐본다. 심심하고 무력할 때 튀어나오는 습관이다. 모를 내는 날, 새참으로 핫도그와 커피를 나르고, 점심으로 닭볶음탕을 차린 오후였다. “이러다 애들이랑 모내기하겠어.” 입학 연기 소식에 장난처럼 뱉은 말이 현실이 되었다. 첫째 온라인 수업까지 신경 써야 하니 하루가 이틀처럼 뻐근했다. 스크롤바를 내리다 내 책에 대한 새로운 서평을 발견했다. 짧은 글이었는데,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생각보다 재밌어서 놀랐다고 가볍게 술술 읽었지만 다른 책보다 길게 여운이 남았다고 쓰여 있었다. 공감하고 힐링이 되었다는 말이 참 따듯했다.


  책을 쓸 때, ‘공감’과 ‘위로’를 늘 곁에 두었다. 아버지와 엄마, 남편과 동생만이라도 고개 끄덕이길 바랐다. 80년대 태어난 이들이 ‘맞아, 나도 그랬어’ 한다면 충분하다 생각했다. 잘 읽히지만 깊이 있는, 눈물과 웃음이 맛과 맛처럼 조화롭게 베여 있는 책이고 싶었다. 부족하고 서툴지만, 그런 모습 그대로 위로가 되길 원했다. 하지만 막상 책이 되니, 상처 받고 모자란 내 모습이 부끄럽기도 고, 또 책 속의 ‘나’가 현실의 나보다 더 괜찮아 보여 뒷걸음쳐졌다.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을지, ‘전혀 공감이 안 되는데?’ 손가락질받지 않을지 숨고 싶었다.

   

  그런 나를 ‘책이 좋다’, ‘읽다가 빵 터졌다’는 말들이 안아주었다. 《엄마의 책장》에 소개된 책을 읽고 싶다는 말에 입꼬리가 자꾸 올라갔다. 어느 날 블로그에서 읽은 서평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내가 저자의 책에 공감하고 눈물 흘리고, 미소 짓는 이유는 저자와 내가 같은 시대를 살고 같은 문화적 체험을 한 80년대 생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 책은 지친 엄마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해준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라는 속담이 내 것이었다. 힘들다 외롭다 했던 지난날을 곱게 닦아 책으로 썼고, 그것을 읽은 이들에게서 더 고운 위로를 받았다. 글쓰기는 참 아름다운 일이다.    


 “네가 사람들과는 아주 다른 삶을 산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따지고 보면 별다른 차이가 없다. 네가 지금 아주 고귀하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삶조차도 과거에 무수히 반복되었던 삶 중 하나에 불과하다.” - 이진우, 《니체의 인생 강의》, 113쪽    


  의미 있게 행복하게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 달렸지만, 이미 누군가 살았던 비슷한 삶이었다. 둘째는 아침에 일어나면 꼭 엄마 품을 찾는다. 먼저 일어나 무언가 하다가 “엄마” 소리가 들리면 이불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재밌는 책을 만났거나, 글이 잘 써지고 있을 때는 참 곤란하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이는 나를 불렀다. 한숨을 감추며 옆에 누워 “잘 잤어?”라고 물으니, 아이가 선하게 웃으며 답했다. “내 발 만져봐. 아침에 일어나서 바로 만지면 이렇게 보드랍다.” 내 발과 다른, 굳은살 하나 없는, 뽀얗고 작은 발이 참 포근했다. 열심히 발버둥 치며 살아간들, 반짝이는 아이의 살결보다 더 고마운 일이 있을까. 그 조그만 발은 오늘도 글이 된다.


photo by Hyowon 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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