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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린 May 30. 2020

그리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2. 포기하고 착하게만 살다가

  신은 죽었다고 말한 니체는 자신의 운명을 누구보다 사랑했다. 목사의 아들, 스물다섯에 교수가 된 천재, 심한 두통과 발작을 안고 산 환자, 니체의 삶은 곧 철학이었다. 니체는 이원론을 근본적으로 회의한다. “선악의 대립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 진리와 거짓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 것인지. 혹은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은 인간이 가치 평가를 위해 만들어낸 관점은 아닌지” 의문을 던진다. (49쪽) 나는 보통 사람을 모범생 아니면 날라리, 강자 아니면 약자나눴다. 하지만 나만 봐도 그리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엄마이다. 두 아이에게 “그렇게 싸울 거면 내일부터 긴급 돌봄 가” 소리치고 나서는 ‘언제 또 이런 날이 올까’ 둘러앉아 쿠키를 만들고 색종이를 접는다. 포기하고 착하게만 살다 보면, 읽고 쓰고 싶은 ‘나’가 수줍게 고개를 들었다.


  저의 어머니 세대만 해도 유교적 전통과 가부장적 관습 속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가정을 위해 헌신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제도와 관습 등 나를 구속하는 것들을 총체적으로 압축해서 상징적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신으로 대변됩니다. 그래서 신을 의지하는 삶은 가장 가벼운 삶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가장 무거운 삶을 사는 것일 수도 있어요. ‘착하게 살아라.’, ‘이웃을 사랑하라.’ 등 도덕적 명령들이 결과적으로는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자에게는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 이진우, 《니체의 인생 강의》, 136쪽.


  하늘보다 높은 어머니 은혜, 나는 그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자장면이 싫다며 찬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좋은 것은 무조건 아껴 자식에게 주는, 고귀한 희생. 그러나 세상에 당연한 일은 없으니, 차라리 착취라 해야 하지 않을까. 한편으로 그런 엄마가 되지 못하는 내가 이상했다. 누구에게나 엄마만이 채워야 하는 자리가 있다. 나 또한 아이에게 생선 몸통을 양보하고, 밤늦도록 그림책을 읽어준다. ‘좋은 엄마가 되어야지’, ‘그것도 못 하니?’ 같은 도덕적 명령은 나를 ‘착한 엄마’로 내몰았다. 나쁜 엄마로 살자니 한심했고, 착한 엄마로 살자니 분했다. 그러나 사람들 대부분 ‘착함’과 ‘나쁨’ 그 사이 어디쯤 있다. 그중 하나를 택할 필요도, 너무 애쓸 필요도 없었다.

      

  시골에 살아 이 긴 봄을 그나마 견딜만하다. 두 아이는 민들레 홀씨를 온 마당에 불고, 애기똥풀 꺾어 그림을 그리고, 초록에서 빨강이 되어가는 딸기를 바라본다. 오후의 자전거 타기는 빼놓지 않는 일과다. 아이들은 “딸기 보고 올게”라며 밖에 나가서는 할머니 집에 간다. 시댁까지 200m 정도 되는 시멘트 길은 차가 다니지 않아 자전거 전용 도로가 되었다. 사실 두 아이의 목적은 텔레비전과 젤리. 온라인 수업을 마친 첫째가 말했다. “나 밖에 나가서 놀게.” 내 눈이 커졌다. “너 또 할머니 집 가려고 그러지?” 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운동할 거라고 자신 있게 나섰다. 잠시 후 나갔더니 밖은 잠잠했고, 자전거는 할머니 집 마당에 있었다. 내 목소리가 높아졌다. “너 자꾸 운동한다고 나가서 텔레비전 볼 거야?” 아이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도 분명 출발할 때는 운동할 생각인데, 여기 도착하면 텔레비전이 보고 싶어 져.” 꼭 내 마음 같아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사실 엄마도 그래.” 아이를 품에 안고 생각했다. ‘맞아. 바르게만, 착하게만 살 수는 없어. 나는 수도승을 키우는 게 아니니까. 나도 자주 무너지는 걸.’ 미스터 트롯을 보며 먹는 왕꿈틀이는 참 달콤했다.


Photo by Tiffany Nutt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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