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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린 May 29. 2020

그리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1. 코로나 19, 여과 없이 무너지다

  평온한 삶이었다. 두 아이는 자기 몫을 할 만큼 컸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매일의 두 시간이 있었다. 나는 내가 조금 자랐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웃으며 넘겼고, 남편의 눈을 보며 감정을 살폈다. 그러나 ‘코로나 19’라는 현실은 달랐다. 두 아이와 묶여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자, 나는 다시 별것 아닌 일에 소리를 지르고, 계획한 일이 틀어지면 마음이 들끓었다. 쌀을 씻다가, 청소기를 돌리다가, 빨래를 개다가 이유 없이 화가 났다. 유치원 개학 무한 연기와 초등학교 온라인 개학, 먹어도 또 먹어야 하고, 치워도 또 치워야 하고, 빨아도 또 빨아야 하는, 긴 시간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전 세계 570만이 ‘코로나 19’와 싸우고, 그중 37만이 죽었다. 의료진은 지금도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내 소란한 일상은 그에 비하면 너무나 고요했다. 아이 돌봄, 긴급 재난, 프리랜서 지원금이 나왔다. 통장에는 생활비가 있고, 냉동실에는 치킨, 피자, 만두가 넉넉했다. 두 아이는 봄꽃처럼 활짝 피었다. 일어나고 싶을 때까지 자고, 하고 싶은 것 하며 보란 듯이 여물었다. 하지만 나는 엄마에서 교사, 조리사, 청소부로 역할을 바꿔가며 바둥댔다. 집은 나에게 쉼을 주지 않았다. 잠시 숨을 돌리면, 너저분한 거실과 건조대의 빨래가 손짓했다. 아이는 따라다니며 질문을 하고, 함께 놀자며 보챘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조급함만 번졌다.     


  사람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곳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항상 자신을 넘어서는 창조 과정의 교량 역할을 한다는 데 있습니다. 자신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두 가지 과정이 필요합니다. 먼저 넘어가는 과정,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오버 고잉’이라고 합니다. 등산할 때 오르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좋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가 딛고 있는 대지의 형세, 대지의 지형, 대지의 속성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현실을 확인하는 ‘다운 고잉’을 할 줄 알아야 해요. 내려갈 줄 알아야 합니다. 근데 우리는 올라가려고만 합니다. 그게 문제인 거죠. - 이진우, 《니체의 인생 강의》, 102쪽.  


  시간과 월급이 사라진 자리에 두려움만 남았다. 나는 여전히 겨울인데, 산수유, 목련은 어여쁘게 돋아났다. 《니체의 인생 강의》는 봄이 건넨 위로였을까. 이 시린 봄을 지내는 법을 알려주었다. 지금껏 오르는 법만 배운 나였다. 계획을 세우고 지킬 수는 있어도, 모든 일이 틀어졌을 때는 어쩔 줄 몰랐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학교와 도서관의 모든 강의가 취소되자, 나는 갈 길을 잃었다. 분명 내리막인데, 어떻게든 오르겠다고 안간힘을 썼다. 니체는 ‘왜 사는가?’라고 물으며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제야 이 허무함 속에서 가야 할 길이 언뜻 보였다. 서구 중심의 합리주의가 무너지자, 있는 그대로의 삶이 드러났다.


  공장과 자동차가 멈추고 사람이 집에 갇히자, 자연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인도 뉴델리 밤하늘에 별빛이 쏟아지고, 브라질 페르남부구주 해변에 멸종 위기 바다거북이 태어났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운하에 물고기가 춤추고, 영국 웨일스 주택가에 산양 무리가 나타났다. 시리아와 리비아의 전쟁이 멈췄고, 각국의 강력 범죄가 줄었다. 코로나 19의 역설은 한국에서 사회 보장 강화와 전 국민 고용보험을 논의하게 했다. 아프리카가 가장 안전한 대륙이 된 것도, 지금껏 선망했던 선진국이 한국을 주목하는 상황도 참 생소하다. ‘코로나 19 이후에는 정말 세상이 달라질까’ 물으며 이 길을 내려간다. 소비 대신 실컷 자고 마음껏 웃는 삶, 계속 이렇게  수 있을. 이 무력감은 참 공평하다. 부자이거나 가난하거나 모두 한 배를 탄 셈이니까. 그렇게 발을 아래로 내디뎌 본다.


Photo by Ivars Utinān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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