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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린 Jan 15. 2022

나는 아직도 아버지가 어렵다

아버지의 딸

  아버지가 말했다. “요즘 윤혜린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게 너무 많아.” 웃으며 넘겼는데, 그 말이 목구멍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딸이 되기 위해 노력한 인생이었다. ‘아무리 해도 그 마음 얻을 수 없구나.’ 애써 지워 보아도,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요즘 바쁘다. 심리상담 배우고, 책 모임 하고, 단체 일도 하고, 학교 수업하고, 하루가 꽉 차 있다. 세상은 넓고 재밌는 것은 많아서 글 쓸 시간이 없다. 나도 가끔은 ‘내가 뭐하며 살고 있지?’ 회의감이 밀려오는데, 아버지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아버지는 등단을 포기하지 않는다. 내가 노벨 문학상이라도 받길 바라는 건가. 가정예배를 드릴 때면, “혜린이에게 좋은 영성을 주셔서 좋은 글을 쓰게 하시고….”라는 기도가 울려 퍼진다. 입시 준비하며 교대에 간다고 했을 때도, 취업 준비하며 교육대학원에 간다고 했을 때도, 아버지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신문 좀 봐. 요즘 애들도 점점 줄어드는데 무슨 교사야? 애들이 선생을 얼마나 무시하는지 알아?” 딸이 교사가 되겠다는데, 탐탁지 않아하는 부모는 처음이었다.     


  아버지는 내 인생을 간섭하지 않았다. 결정적인 것을 스스로 선택했다. 국어국문학과를 들어가고, 직업을 선택하고, 결혼을 하는 것, 모두 내 결단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놓지 않는 끈질긴 주문이 있다. ‘좋은 글을 써라.’ 메일함에 ‘아버지’ 폴더가 따로 있다. 정여울의 칼럼과 호밀밭의 파수꾼 서평, 이효석 문학상의 수상 소감 같은 것들이 배달된다. 더러는 열어보지도 않지만 부담스럽다. 언제쯤 아버지가 원하는 딸이 될 수 있을까.


  어린 시절, 아버지는 나를 보며 “얼굴이 그게 뭐냐?”, “커서 뭐가 되겠냐?”라며 짓궂게 놀렸다. 그러면서 내가 없는 곳에서 칭찬을 했다. 아버지의 지인이 “아버지가 널 얼마나 많이 자랑스러워하는데….”라며 나를 추켜세우면 진심으로 숨고 싶었다. ‘이토록 어정쩡하고, 보잘것없는 나를 비웃었을 거야’ 짐작하며….


  스물일곱, 임용 준비생으로 위장하고 글을 썼다. 유일한 탈출구는 등단이었다. 미친 듯이 쓰고 고쳤다. 한참을 공들인 작품을 보낸 날이었다.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심사평에 이름 정도는 거론될 줄 알았다. 이른 아침, 경인문고에 도착해 문학동네 여름호를 열었다. 내 작품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었다. 무엇이 문제냐고 누구라도 붙잡고 따지고 싶었다. 그해 겨울, 신춘문예 여덟 곳에 원고를 보냈다. 휴대폰에 모르는 번호가 발신되면 심장이 쿵쾅거렸다. “여보세요.” 택배 아저씨 보험 회사 직원이면 허탈해서 눈가가 주름졌다. 임용 고사는 떨어졌고, 나는 아버지 앞에서 더 작아졌다.


  스물여덟 새해 첫날, 식탁 위에 조선일보가 올려져 있었다. 등단 작가 사진들이 광화문에서 찍은 사진이 첫 면이었다. 아버지가 내 쪽으로 신문을 밀며 말했다. “한 번 읽어 봐.” 별 뜻 없는 한 마디가 묵직하게 온몸에 내려앉았다. ‘소설 부문 – 설은영.’ 그녀는 이외수의 차부였다. ‘나는 이 미약한 족보에서 애초에 글을 쓸 수 없는 운명인가 보다. 평범한 내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랐어.’  이상 쓰고 싶지 않았다. 누구도 읽지 않는 글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절필, 덕지덕지하고 치렁치렁한 내 글을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넣었다.     


  얼마쯤 지나 상견례를 하고, 결혼을 했다. 예식장에 들어가는 나는 아무도 써주지 않은 노동력이었다. 신부 입장을 할 때, 과하게 웃은 까닭은 패배감을 감추기 위해서였을까. 아버지가 오래전부터 예견했던 가장 비참한 결말에 도착한 기분이었다. 실패자라는 각인만이 나를 설명했다.     


  비범한 작가가 되고 싶었다. 아버지가 나에게 강요한 것인지, 처음부터 내가 품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너무 많이 들어, 내 것 같은 이름, 작가. ‘아버지 때문이야’라며 눈을 흘기기에는 내 열망도 강했다. 문장 하나에 가슴이 서늘해지고, 단어 하나에 손끝이 아려오는 글을 쓰고 싶었다.


  두 아이를 키우며, 씻기고, 먹이고, 치우며, 내가 사라졌다. ‘엄마’로만 남은 내가 한심했다. 밤이면 나를 위해 썼다. 배운 게 쓰는 것밖에 없어서, 슬프면, 화가 나면, 억울하면 나도 모르게 노트북 앞에 앉았다. 남편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를 모니터는 가만히 들어주었다. 쓰다 보면 마음이 갈 길을 찾아갔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 또한 예상치 못한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간다. 글을 쓰며, 내가 내 옆에 있어 준다. 괜찮다며 넘긴 그날을 회상하며 이제야 서럽다. 굳이 ‘치유’라고 명명하지 않아도, 쓰기 전과 후의 나는 분명 다르다.   

  

  나는 글이 어려웠다. 모니터 뒤에 심사 위원을 앉혀놓고 글을 썼다. 아름다운 미사여구는 죄다 가져왔다. 사는 것도, 먹는 것도, 사람도, 길거리도 나는 모든 것이 불편하다. 그 원형은 아버지다. 나는 아직도 아버지가 거북하다. 기대에 못 미치는 내 모습이 누추하다.     


  상상 속 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버지는 제가 마음에 드세요?’ 아버지는 별말 없이 웃는다. 그걸 아직도 모르겠냐는 표정이다.     


  한 장면이 떠오다. 나는 아침마다 아버지 차를 탔다. 중고생 때는 학교로, 대학생 때는 지하철역으로, 취업준비생 때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스물일곱 딸을 날마다 도서관으로 실어 나르며 “점심은 잘 먹고 있냐?”라며 용돈을 주었다. 자동차 안에 라디오가 흘렀다. 아버지는 별말이 없었다. 나를 이토록 참담한 인간으로 만들어 놓은 사람이 아버지였다. 순간 아버지 가슴에 쌓인 차마 내게 뱉지 못한 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사랑이었을까.


  아버지는 내가 밥하는 것을 싫어했다. 엄마에게는 하루 세끼 차리길 바라면서, 내가 평범한 가정주부로 지내는 것은 안타까워했다. 아버지가 우리집에 오면 온종일 부엌을 벗어나지 못하는 딸에게 “저녁은 나가서 먹자. 대충 먹어”라고 말했다. 문득 모습이 참 따뜻하다.


   아침마다 갔던 공원, 시월애를 봤던 영화관, 조각상이 있던 미술관, 함께 먹은 떡볶이, 가정예배 끝난 뒤 했던 게임, 꽤 비쌌던 소설 전집까지, 이 글을 쓰며 아버지와 내가 있던 풍경이 하나로 꿰어졌다. 치명적인 상처로 얼룩져 꺼내보고 싶지 않은 지난날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모든 것이 ‘사랑’처럼 느껴진다. ‘난 언제나 아버지 딸이었구나’ 돌고 돌아 그 비릿한 진실에 비로소 도착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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