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니뎁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26년전 모습을 볼 수 있는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는 명작으로 손꼽히는 가족영화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지적장애를 가진 동생을 아버지처럼 돌보는 길버트를 통해 관객들은 진정한 '가족'과 '자신'을 모두 돌아볼 수 있다.
특히 가족상담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를 한 번쯤은 꼭 봤을 거라 생각한다. 사례 분석 과제 중 단골 소재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이 작품을 과제 덕에 봤다. 폴더 정리를 하던 중 보고서 파일을 발견했는데, 그때의 노력이 아까워 브런치에 조금 남겨보고자 한다.
당시 나는 가계도작성을 바탕으로 그레이프 가족의 가족관계, 하위체계, 경계선, 자아분화 수준, 정서적 삼각관계를 살펴봤고 영화에서 사용된 치료적 요소들을 분석했다. (원작 소설은 분석에 반영되지 않았다)
1. 아버지 : 작중 17년 전 자살했다. 아무 징조 없이 자살했기 때문에 가족도 원인을 알지 못한다. 길버트의 묘사를 통해 자기표현을 잘 하지 않아 속을 알 수 없고 무뚝뚝한 아버지였을 것으로 예상된다.
2. 어머니 (보니 그레이프) : 과거 미인이었지만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작중 7년 전부터 무기력한 상태로 거실에서 움직이지 않아 초고도비만 상태이다. 초반 마을에서는 비대한 몸 때문에 조롱거리이다. 남편의 죽음을 받아드리지 못하며 ‘아버지’라는 말에 격렬하게 분노한다. 지적 장애를 가진 어니를 유독 아낀다.
3. 첫째 딸 (에이미 그레이프) : 전직장의 화재로 인해 일을 그만 두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미혼이며 형제들에게 엄마와 같은 역할이다.
4. 둘째 아들 (래리 그레이프) : 오래 전 집을 나가 가족들과 단절됐다.
5. 셋째 아들 (길버트 그레이프) : 지적장애를 갖고 있는 어니의 보호자 역할이다. 어디를 가든지 어니와 동행한다. 식료품점에서 시간 외 근무까지 하며 가족의 생활비를 벌고 있다. 실질적 가장이다. 커트 부인과 불륜관계를 맺고 있다. 아버지처럼 자기 표현이 적고 말이 없다. 어머니를 걱정하면서도 창피하게 여긴다.
6. 넷째 아들 (어니 그레이프) : 지적 장애인이다. 의사들은 10살을 넘기기가 어렵다고 했지만 18살 생일을 앞두고 있다. 물을 무서워하고 높은 곳에 올라가지 좋아한다. 엄마의 돌봄을 실질적으로 받고 있지는 못하지만 엄마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7. 막내 딸 (엘렌 그레이프) : 외모에 부쩍 관심이 많아진 16살이다. 부친의 자살이 17년인 전인 것으로 미루어 짐작했을 때, 부친 자살 후 태어난 자식인 듯하다. 막내이지만 엄마의 관심은 어니에게 집중되어 있다. 길버트와는 사이가 좋지 않다. 아버지처럼 잔소리하지 말라며 툭하면 신경전을 벌인다. 언니 오빠와 달리 어니에게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부부 하위체계의 주요 기능은 성, 사랑, 친밀감이며 협상과 조정을 통해 건강한 체계를 유지한다. 작중 갑자기 사라진 아버지가 나중에야 자살한 채로 지하실에서 발견됐다는 점에서 부인과 생전 남편의 부부관계는 단절, 소원한 상태였고 정서적으로 친밀하지 않은 체계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부모-자녀 하위체계는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우울로 인해 무너졌다. 자녀들이 부모의 돌봄을 받는 대신 자녀들이 어머니를 돌보고 있으며, 부모로서 지적 장애를 가진 동생을 책임지고 있다.
형제-자매 하위체계의 경우 그레이프家의 형제들은 최소 청소년기 때문에 부모 대신 서로를 돌봐야 했기에 형제-자매 하위체계를 형성하기 보다는 서로 부모-자녀 하위체계를 이룰 가능성이 높다. 에이미를 엄마 같은 누나라고 소개하는 길버트와 아버지와 딸의 갈등과 유사한 길버트와 엘렌의 갈등은 이를 잘 보여준다. 어니를 실질적으로 부모처럼 돌보는 일도 에이미와 길버트의 몫이다.
주인공 길버트 그레이트의 자아분화 수준은 보웬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자기분화척도 점수 26-50점 정도로 추측된다. 해당 수준의 특징은 목표지향적인 행동은 하지만 타인의 인정을 받기위해 행동하므로 타인의 정서체계에 의해서 유도됨. 다른 사람의 감정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직장은 물론 친구들을 만날 때에도 어니와 함께 하는 모습, 베키와의 데이트 도중 어니의 목욕을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 등을 통해 길버트의 자아분화 수준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커트부인은 ‘가족한테 꽁꽁 묶여 자신은 잊고 사는 불쌍한 길버트’ 라는 말로 길버트의 자기분화수준과 처지를 직면하게 한다.
길버트는 베키가 자신을 위해 원하는 것이 없냐는 질문을 했을 때, 그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답한다. 길버트가 말하는 ‘좋은 사람’의 의미는 스스로 정의한 좋은 사람이 아닌, 사회에서 요구하는 좋은 사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길버트에게 있어 가족을 돌보는 일은 가족애와 더불어 도덕적인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행위로 볼 수 있다. 어니가 때때로 죽었으면 하는 마음과 어머니를 마을사람들과 같이 ‘고래’라고 표현하는 모습은 가족을 짐처럼 여기는 길버트의 내면을 드러낸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큰 형처럼 가족을 내팽개칠 수 없다.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그레이프家의 삼각관계는 길버트와 어머니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남편의 자살로 인해 부부체계의 불안을 해소할 수 없는 어머니는 남편 대신 길버트를 의지하고 있다. 또한 어머니로서 어니를 돌보지 않으면서 길버트(와 자녀들)에게 돌봄을 떠맡기고 있다.
1. 어니 그레이프
지적장애를 가진 어니는 어머니와 더불어 그레이프 형제들을 힘들게 하는 존재이지만, 가족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한다. 작중 그레이프 가족의 갈등은 어니의 생일파티 전날 발생한다. 어니가 18살이 되는 것을 간절히 소망했던 어머니는 정작 파티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하고 어니는 간신히 마련한 케이크를 한 번 더 망친다. 에이미는 어머니의 태도에 화를 내고 길버트는 케이크를 망친 어니를 때린다. 두 사람 모두 그동안 쌓인 내면의 분노가 터져 나온 것이다. 하자만 가족들은 서로 분노하였으나 어니의 생일파티를 위해 결국은 다시 하나가 된다. 또한 가스탱크에 올라 경찰서에 구금되었던 어니 덕에 어머니는 자신의 현실을 깨닫게 된다.
2. 베키
가족에게 속박되어 있는 길버트와 달리 베키는 자유를 상징한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안정적인 돌봄 대신 양가를 왔다 갔다 하며 살았던 베키는 자신의 환경을 탓하지 않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현실을 살아낸 인물이다. 베키는 사소한 일에 연신 사과하는 길버트에게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될 일에 미안해 하지 말라고 조언하기도 하며, 가족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늘 자신보다 타인에게 집중되어 있는 길버트가 스스로를 들여 다 볼 수 있도록 한다. 베키에게 호감을 느낀 길버트 또한 어니 대신 자신의 마음에 집중하려는 태도를 보이곤 한다. 길버트뿐 아니라 베키는 어니와 길버트의 어머니에게도 치료적 영향력을 끼친다. 어니를 살갑게 대하며 물을 무서워하는 어니가 물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돕고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좌절하는 길버트 어머니에겐 자신도 처음부터 이렇지 않았다며 격려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길버트는 19살이 된 어니를 데리고 베키와 함께 여행에 동행하게 된다.
가족상담을 공부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내 가족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자주 생각한다. 아직 내가 가정을 이루기 전 상담을 배울 수 있어 참 감사하다고. 내가 가진 잘나고 못난 모습들을 발견할 때마다, 미래를 위해 기도한다. 그리고 나를 이만큼 키워주신 지금에 가족에게 감사한다. 완벽한 가족은 없다. 오목조목 따지면 그 어떤 가족도 길버트가와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 부모님을 탓할 필요도, 배우자 탓할 필요도 없다. 피해자를 찾아야 한다면 개개인 모두가 피해자다.
무언가를 바꾸고 싶다면 나를 바꾸는 것이 가장 최선의 길이고 가장 빠른 길이다. 길버트가 베티를 만나 변화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결국 '선택'을 한 건 길버트다. 선택을 할 수 있는건 스스로 밖에 없다. 우린 때마다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 그리고 최선을 다했다면 그 노력에 후회할 필요도 없다. 잘못했다면 앞으로 잘하면된다. 이렇게 반복하며 살다보면 변화를 위해 달려갈 길 끝에 다달아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