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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헬레나 Jan 31. 2024

센스있는 꽃 선물

우리들의 젊은 날

딩동~~  누구지??

요즘 택배 아저씨는 벨도 안 누르시고 그냥 현관문 앞에 두고 가시니 우리 집 벨 누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주문한 것도 없는데 배달 왔다는 소리에 눈이 동그래져 문을 열었다. 두 팔 가득 안기는 묵직한 꽃다발을 들고 계시는 아주머니. "누가 보낸 거예요?" 여쭈니 잠시 후 연락 올 거라면서 서둘러 가신다. 이 서프라이즈는 누구지? 설마 며칠째 냉전 중인 남편? '마땅한 화병도 없는데 이 꽃을 어디에 꽂아두지?' 하며 걱정하고 있는데 비슷한 시간 같이 배달된 쿠팡 택배. 열어보니 화병이 들어있다. 주문자는 바로 두둥~~~ 어제 통화했던 대학원 동기 친한 언니 ♡


"네 생일이 다가오는데, 혹시 뭐 필요한 거 있어? 아니면 서프라이즈 선물 괜찮아? 혹시 실용적이지는 않아도 예쁜 거, 클래식한 거 보는 거 좋아해?"

"응, 언니. 난 요즘 뭐 갖고 싶은 것도 없고. 아무거나 좋아. 예쁜 그림? 그런 거 잘 모르지만 좋아하는 척 해. 좋아 좋아." 예쁜 장식품이나 액자 같은 거 보내려나 하고 전화를 끊었었다.


20대 중반 대학원에서 만난 지금은 영혼의 단짝이자 삶의 희로애락을 나누는 사이가 된 동기 언니.

학부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하고 대학 졸업 후 둘 다 교사의 꿈을 안고 교육대학원에서 만났다. 현직 교사들이 반 이상을 차지하는 교육대학원에서 우리는 학생의 신분으로 서로 의지하며 논문 쓰고, 같이 임용시험 준비하며 더 가까워졌고 15년도 더 지난 지금도 힘들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그런 든든한 동반자이다. 첫 임용고시 실패 후 둘 다 바로 사립학교에서 3년 이상 근무했고, 각자 학교에서 정교사를 꿈꿨지만 결혼과 출산으로 자연스레 학교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고 아이 육아에 전념하고 있었다. 우리는 교사가 되려고 대학원 갔는데 꿈은 못 이루고 이런 좋은 언니, 동생 만나려고 그 비싼 학비 쏟아부었나 보다 하며 웃어넘긴다. 학교가 맺어준 인연이다.


꽃 선물을 받아본지가 언제더라.

압구정 맥도널드 앞의 노점상 꽃집에서 장미 한 송이 사서 건네주던 썸남. 사귄 지 1주년이라고 꽃다발 사들고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 그리고 프러포즈날 받았던 꽃다발. 입학식, 졸업식 이외에 개인적으로 받은 꽃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이다. 사실 받을 때만 기분 좋고 며칠 지나 시들어가는 꽃들을 볼 때마다 어떻게 처리하나 하는 생각에 그리 선호하는 선물은 아니었다. 그 돈이면 립스틱이나 실용적인 선물을 선호했던 나. 그런데 결혼 후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번도 받지 못한 꽃을 선물 받고 나니 20대 찬란했던 그 시절이 떠오르며 젊은 기운이 샘솟는다. 아, 예쁘다. 집안 가득 꽃향기가 그득하다. 언니의 메시지는 더 감동이다.


연분홍 블링블링을 사랑하며 인기를 뿜던 20대 oo대학원의 네 취향의 향수를 되새기며 꽃이 생각나더라. 아기엄마가 되고 학부형이 되어도 너의 예쁜 취향이 바뀌진 않았을 것 같고 마침 나도 꽃이 눈에 들어와 이걸 선물해주고 싶었어. 짧지만 강렬하게 예쁜 모습을 눈의 기억 속에 오래 담아 간직해 주길 바라. 시간이 지나도 이 화병은 남아 계속 주인과 예쁜 세월 누리길.


센스 있게 화병도 같이 같이 보내준 언니. 이 화병도 예쁜 세월 누리도록 예쁘게 돌봐줄게.

 


20대 때 즐겨봤던 미드 <프렌즈>에서 레이첼이 테이블을 세팅하며 '세너피스~' 찾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게 뭐지? 테이블 중앙을 꽃으로 예쁘게 장식하던 문화가 생소했던 나는 몇 번을 돌려본 뒤 'centerpiece'라는 말을 처음 알게 되었고 고급진 테이블 장식에 매료되었던 기억이 있다. 결혼하면 저렇게 예쁘게 센터피스 놓고 우아한 식사 즐기고 싶던 꿈이 있었는데 언니 덕에 성취했다.




며칠 전 스타필드에 갔다가 10년 전 근무했던 학교의 선생님을 10년 만에 우연히 마주쳤다. 엇갈려 올라가고 내려오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마주쳤는데 너무 반가운 나머지 나도 모르게 에스컬레이터를 막 거슬러 내려가 호들갑 떨며 인사하고 담소를 나눴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그 시절 같이 근무했던 다른 몇몇 선생님들께도 안부를 전했다. 학교 분위기가 너무 좋았던 터라 문득문득 그리웠는데 한 선생님의 카톡을 통해 왜 그렇게 그 시절이 생각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들의 젊은 날


순수하고 예쁜 학생들이 많고 학교 분위기도 좋아서 그리웠노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내 젊은 날이 그리웠던 걸지도 모르겠다. 군살하나 없이 어떤 옷도 잘 어울렸던, 핑크핑크 화사했던 풋풋했던 젊은 날. 찬란했던 그 시절. 학생들과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아 공감대도 많았던 사제지간.


꽃들은 시간이 지나면 꽃잎 끝이 바래지며 파스락 메말라가다가 고개를 떨군다. 시들어가는 꽃을 보는 게 꼭 나이 들어가는 내 모습과 닮아 꽃을 멀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언니는 고속터미널 꽃 도매시장에서 정기적으로 꽃 배송을 받는다면서 내게도 알려준다. 저렴한 가격으로 생활 속 작은 활력을 얻는다면서. 꽃들이 하나둘씩 시들 때 즈음 다시 새로운 꽃들로 바꿔준다고.



꽃 선물로 우리들의 젊은 날을 추억할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워. 동성에게 받는 꽃이 더 감동적이네. 울적해질 때마다 아름다운 화병에 예쁜 꽃 채워 넣으며 기운낼 수 있을 것 같아. 꽃의 시듦을 두려워하지 않을게. 싱싱한 꽃들로 화사하게 다시 화병을 채우면 되니까. 나이 듦을 두려워하지 않을게. 나이에 맞는 멋스러움으로 또 나를 채우면 되니까. 그 길에 언니가 함께 있어서 든든해. 고마워 언니.


언니도 같은 화병에 꽃 담고 있다며 보내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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